현대 사회 생존법 : 맨눈으로 바라보기

2025-01-13 Off By rainrose2718

한마음 도서관의 철학 신간 코너에서 처음 발견한 책이다. 간단한 제목과 표지 디자인, ‘알랭 드 보통’이라는 어쩐지 익숙한 작가의 이름에 끌려 읽기 시작하였다. 2년간의 경남과학고 생활을 거치며 내면의 투쟁에 가깝게 사유하였던 내용을 다른 이의 언어로 다시금 구체화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Quotes

현대에 일어난 상당수의 변화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며, 심지어 짜릿하기까지 하다. 광케이블이 지구를 둘러싸고, 위성은 우리를 도시에서 도시로 안내하며, 새로운 생각들이 종래의 경직된 가정을 뒤엎는다. 공항이 땅에서 마술처럼 출현하고, 화학과 물리학이라는 프로메테우스적 힘에 의해 막대한 에너지가 풀려난다. ‘현대’는 여전히 화려한 매혹, 욕망, 야심 찬 열망의 상태를 암시하는 단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대의 도래는 비극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새로운 자유는 무척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집단적 광기 혹은 행성 차원의 절멸에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적이 없었다. 현대성은 우리의 내면과 외면의 풍경을 사정없이 황폐화시켰다. 이 재앙의 양상을 일곱 가지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최민우 역, 오렌지디, p. 14

우리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전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정말로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촉구일 것이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뉴스는 용서하고, 반성하고, 음미하고, 감사하고, 고요하고, 친절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뉴스다. 이런 뉴스야말로 화재, 살인, 추락, 위기 같은 소식들을 제쳐두고 우선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마음에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도록 해야 하는 진정한 뉴스다. 뉴스란 가끔, 사실 대부분은 그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 가장 덜 중요하고 가장 덜 긴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최민우 역, 오렌지디, p. 87.

결국 진정한 연인이라면 서로의 속마음이 어떤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혹 자신이 설명하지 않은 것들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분노한다. 자연히 성에 대해서도 불필요하게 공격적인 견해를 갖게 된다. 우리는 서로의 욕망에 대해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섹스와 사랑이 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당황하여 원래는 문제없던 완벽한 관계를 끝내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진정한 연인이란 서로의 모든 것을 흠모, 존경하는 것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두 사람이 서로를 더 나은 존재로 성장시키기 위해 이끄는 일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깨닫지 못한다. 진정한 연인이라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라지만,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타인의 완벽함에 대한 경외심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사랑은 타인의 결점과 부족한 면을 인내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최민우 역, 오렌지디, p. 136.

우리는 고독을 다룬 위대한 예술 작품 속 인물들의 후손이자 영혼의 쌍둥이라는 자부심을 품어야 한다. 우리가 고독한 이유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고귀한 정신을 갖고 있으며 사교성에 대한 이상이 높기 때문이라는 걸 믿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그저 현재 공동체가 제공하는 허울뿐인 증표를 받기보다는 차라리 집에 있는 걸 선호할 뿐이다. 사람들이 외로움을 덜 느끼게 하는 방법은 숲이나 식당, 도서관, 혹은 사막에서 사색에 잠겨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내 볼링을 치러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혼자 있는 것이 실패의 표시가 아니라고 안심시키는 것이다. 현대에 벌어진 외로움의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고독을 원위치로 되돌리고 독신 생활의 품격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혼자 식사한다고 문제 될 것은 없다. (중략) 현대는 우리에게 그 점을 상기시켜 주지 못했지만, 사실 우리는 지금껏 존재했던 이들 중 가장 고상하고 세련된 영혼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혼자일 뿐, 실은 최고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최민우 역, 오렌지디, p. 170.

우리는 삶이 병원이 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시설이라는 것을, 인간은 죽을 운명이고 병든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매순간 불안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리는 한없이 나약하며, 항상 새로이 실망스러운 현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남들에게 절대 ‘잘 산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재정적으로나, 연애로나, 평판으로나, 실존적으로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 자동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밝고 활기찬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광고판의 암시를 근절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는 휴가 중에도 비참해질 것이며, 삶의 여러 측면에서 ‘잘’ 해낸 순간에도 대부분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밉고,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그때그때 다르게 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최민우 역, 오렌지디, p. 287-289.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고통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우리 인간이라는 종이 그것을 전부 이해하고 해결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을 뿐이다. (중략) 우리는 수많은 영역에서 나름의 중세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다만 자신들이 성서의 저주를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뇌에 휩싸였던 13세기의 사람들과는 달리, 실험실에서 시제품이 나오길 기다리는 과도기에 살고 있다. 현대만의 특별한 고뇌는 더 나은 미래의 형태가 보인다는 데서, 고통이 필수 불가결하지 않다는 데서, 수평선 위 구조선을 발견했지만 구조대가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죽어 있으리라는 점을 인식하는 데서 온다.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최민우 역, 오렌지디, p. 293-294.

우리는 우리의 목적에 대해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처해 있던 본질적 수수께끼에 대해 탐색하려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시도하거나, 그것을 알아보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는 한, 모든 삶은 확실한 가치를 지닌다. 인간은 알고자 하는 동물이다. 현대는 혼란의 시기일지 모르나, 필연적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은 분명하다. 쳇바퀴처럼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상황 속에서 계속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고도의 잠재력에 맞추어 보다 섬세한 방식으로 근본적인 어둠을 조금씩 밝히고, 현대의 위험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최민우 역, 오렌지디, p. 294-295.

Introduce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당연하고 익숙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에 대해 그 가치가 만들어진 과정을 담담하게 소개하여 이들을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항상 당연하다고 여겨 왔던 상식을 의심하는 시도는 따뜻한 공허함과 함께 위로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기존의 가치를 포기해야 한다는 충격에 사로잡혀 몸담고 있는 현대 사회를 완전히 부정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들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가치라는 것을 인정하고 현명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현대’가 주는 상처와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주위를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소비 자본주의, 광고, 물질주의, 매체, 민주주의, 가족, 사랑, 성, 외로움, 일, 개인주의, 조용한 삶, 바쁨, 추함, 교육, 완벽주의, 과학과 종교, 자연. 이들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이다. 우리는 누구나 돈만 있다면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소비 자본주의를 현대 사회의 축복으로 여긴다. 또한 매체를 통해 방 안에서 전 세계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의 의견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여기며 이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낸다.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며 영혼의 단짝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가꾸어 나간다. 신실한 종교적 믿음이 아닌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 더 나은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사회적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현대 사회는 우리가 타고난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더욱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또한 그렇게 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드리운 가치에는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비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극대화하여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부여하며, 기업들은 이윤 추구를 위해 소비자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무의미한 소비를 부추기고 환경 자원의 소모를 가속화한다. 매체가 전해준 세계의 암울한 소식은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평범한 다수에게 무력감을 안겨 주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다수의 압제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는 한편,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선출된 정치인들은 국민이 아닌 표를 위한 정치를 한다. 주객(主客)이 전도된 교육은 ‘대학 진학’만을 위해 제공되는 기형적인 사교육 산업과 부실해진 공교육을 낳았다. 낭만적 사랑의 환상은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랑에게 패배자의 징표를 부여하고, 그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꿈꾸고 노력하도록 하였다. 종교가 힘을 잃은 세상에서는 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과학은 삶에서 직면하는 모든 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가능한 대상으로 환원하고, 인간이 혼돈을 통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여 자연의 착취를 부추긴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과 선택의 자유를 주었고 마음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비참할 자유는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현실에 만족하기 보다는 더욱 행복해지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한다. 그 자리에 도달한 이들에게는 선망의 눈빛을 보내며 존경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게으르다’, ‘노력이 부족하다’라고 평가하며 냉소의 눈빛을 보낸다. 역설적으로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기에 대다수는 그 이상향인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고 우울, 불안, 외로움과 같은 현대 사회의 질병을 겪게 되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의 가치들을 부정하고 과거로 회귀해야 하는가? 문명의 이기를 모두 떨쳐내고 수렵 채집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어렵고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우리는 현대에 거주하는 주민으로서 현대 사회의 가치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이전과 같이 현대에 순응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 현대가 부여한 이상향에 굴복하고 이룰 수 없는 행복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현대 사회와 한 발짝 떨어져 보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형성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그럴 만한 이유를 파악하며,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든 이들의 이상향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혹은 부정과 저항의 대상으로 삼아 왔던 현대 사회의 가치들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소비 자본주의는 개인의 서사가 중요성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소비가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부상하며 성장한 것이다. 인쇄 기술이 발전하며 등장한 매체 산업은 ‘새로운 것이 곧 중요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 작동한다. 민주주의는 그 구조 자체가 다수의 압제를 유발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간 이들도 있었다. 교육 제도는 노동자들에게 필요로 하는 역량을 길러내고자 하는 기업의 요구에 부응하여 순응과 복종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진정 자신을 위한 배움에 이르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의지로 내면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한다. 낭만적 사랑은 19세기 후반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태어난, ⟨피그말리온 신화⟩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기원한 하나의 클리셰에 불과할 뿐이다. 외로움은 우리 문화가 혼자 있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도록 하였기에 생겨난 감정이며, 현대 이전에는 홀로됨이란 신이나 진정한 내면과 교감할 수 있는 고귀한 기회로 여겨졌다. 과학은 아직까지 수많은 불확실성을 품고 있으며, 인간의 무지와 불완전을 철저히 드러낸다. 그렇기에 종교와 양립할 수 있으며, 과학이 서술하는 우주의 역사를 읽으며 경외를 품을 수 있다.

현대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현대 사회가 선으로 규정한 가치와 목표,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삶을 사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책과 자기 혐오, 불안과 우울로 이어지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이들을 그저 ‘사회 부적응자’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보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가 부여한 불완전한 가치와 당위에서 한 발짝 물러나, 한 사람으로서의 서사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현대 사회와 공존할 수 있다.

자신이 현대 사회에 잘 적응하고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면, ‘실패한’ 사람들을 보고 ‘나는 저런 삶을 살지 않아 다행이다’라며 안일하게 안도하지 말고 ‘나도 언젠가는 저들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어떤 이유로 불운을 겪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자. 자신이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고 비참하게 ‘실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면, ‘성공한’ 사람들을 보고 ‘나는 왜 저런 삶을 살 수 없을까’라고 생각하며 주어진 환경이나 자기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아무나 걸어올 수 없는 길을 걸어온 삶 자체가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서사를 긍정해 보자. 그동안 달성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목표와 이상에 대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가, 현대가 심어 준 하나의 환상일 뿐인가?’하고 의심해보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에 몰입해 보자.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믿음 중 하나는 ‘내일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면밀히 이해하고 분석하여 그 이유를 알아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이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대부분 성공하였다. 19세기와 20세기에 인류가 당면한 실질적인 고통은 가난과 기아, 질병과 같은 물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인류는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하여 농업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고, 예방접종을 보편화하여 전염병의 위험에서 해방되었으며, 의료 기술의 발전은 암(癌)을 정복하는 경지를 넘보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사회보장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가난으로 생명에 위협을 받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전 세계적으로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부나 원조가 보편화되어 이들의 삶도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사회 제도의 정비를 통해 물질적인 부분에서 인류의 삶을 극적으로 개선시켰다.

그러나 21세기의 우리가 당면한 실질적인 고통은 정신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우리나라에서 임산부에게 출산 수당을 지급하거나, 3명 이상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 다자녀 혜택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물질적인 보상’을 제공하는 출산 정책이 현재의 낮은 출산율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암모니아 합성법이나 예방접종에 비견할 만한 혁신적인 철학적 사유의 등장과 확산이 필연적이다. 20세기의 과학자들이 가난과 기아, 질병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던 것과 같이, 21세기의 철학자들은 불안, 우울증, 자기 혐오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끊임없이 사유할 것이다. 그 사유는 분명 현대 사회의 가치들을 의심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과 타인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상암동의 쇠가락

시(詩) 한 편을 소개하며 서평을 마무리하고 싶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에서 우연히 보았던 신경림의 서정시이다. 이 시를 읽으며 자신과 타인의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 어떠한 모습인지 어렴풋이나마 상상해 보자.

동이 트기 전에 상암동 산동네 사람들은
타이탄 트럭1에 짐짝처럼 실려
소삿벌2 비닐 채마밭3으로 들일을 나간다

소주 한 주발에
묽은 된장국으로 시작되는 들일은
시골살이보다 오히려 고달퍼서
때로 뽑힌 명아주 뿌리로
눈에 핏발들이 서지만

다시 타이탄 트럭에 짐짝으로 쟁여
돌아오는 상암동 산동네는
고향만큼이나 정겨운 곳
낯익은 악다구니에 귀에 밴 싸움질들

좌도 상쇠 우도 끝쇠
느린 길굿가락으로 이내 손이 맞아
호서 버꾸잡이4까지 어우러져
덩더꿍이 가락에 한바탕 자지러진다

보라 판이 끝난 뒤에도 그 쇠가락
저희들끼리 낄낄대며 골목을 오르내리다
잠든 산동네 사람들
고단한 꿈속엘 숨어들어가
붉고 고운 열매로 맺히는 것을
소삿벌 비닐 채마밭에까지도 뿌려질
질기고 단단한 열매로 맺히는 것을

새벽이면 상암동 산동네 사람들은
그 열매를 하나씩 속에 안고
소삿벌 비닐 채마밭으로 들일을 나가고

「상암동의 쇠가락」전문(신경림,『가난한 사랑노래』)

지금의 마포구 상암동은 SBS, MBC 등 방송사들이 모여 ‘DMC’를 이루고 있고,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번듯한 동네이기 때문에 시에서 말하는 ‘상암동 산동네’의 모습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발표된 1988년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상암동은 서울의 그 어느 동네보다 열악한 장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암동 바로 옆에는 ‘난지도’가 있다. 지금은 생태 공원으로 거듭나 관광지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80년대 당시에는 수도권 전역의 쓰레기들이 매일같이 운반되어 쌓이는 거대한 매립지의 역할을 했다. 그 안에는 돈이 되는 쓰레기를 골라내어 시장에 파는 넝마주이가 있었고, 그 옆에는 쓰레기 냄새가 물씬 나는 산동네에서 판잣집을 짓고 생활하는 이들, 상암동 사람들이 있었다. 시의 화자는 그런 상암동 사람들의 ‘시골살이보다 고달픈’ 생활을 생기있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는 상암동 사람들의 삶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트럭에 짐짝처럼 쟁이지 않고 안전벨트가 구비된 좌석버스에 타고 일터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고, 소주 한 주발에 묽은 된장국이 아닌 제대로 된 아침 식사로 들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다. 연민의 시선이 아닌,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들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생기를 발산하는 모습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타이탄 트럭에 짐짝처럼 쟁여 돌아온, 고향만큼이나 정겨운 상암동 산동네에서는 낮익은 악다구니와 귀에 밴 싸움질이 펼쳐지고 있다. 너무나도 익숙한 일상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악다구니’와 ‘싸움질’은 도시의 평화를 해치는 ‘경범죄’이지만, 산동네 사람들에게는 동네를 활기차게 만드는 정겹고 익숙한 일상인 것이다. 좌도 상쇠, 우도 끝쇠, 호서 버꾸잡이와 같은 여러 지역 출신의 노동자들이 어우러져 철제 농기구 소리로 만든 덩더꿍이 가락에 한바탕 자지러지는 모습과, 저희들끼리 낄낄대며 골목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과연 우리는 저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가, 또한 저들만큼 스스로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어떠한 타인의 삶 또한 긍정할 수 있는가?

주석

  1. 타이탄 트럭: 기아자동차가 1971년 처음 출시한 4륜 트럭.

  2. 소삿벌: Google 검색에서 등장하는 ‘소삿벌’은 경기도 평택시의 지명을 지칭하나, 상암동에서 트럭 짐칸에 실려 간다는 시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일대의 들판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됨.
  3. 비닐 채마밭: 비닐으로 멀칭을 한 채소밭(채마밭)

  4. 버꾸잡이: 북을 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