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추억

2025-04-19 0 By rainrose2718

내일, 아니 오늘 오후 한 시에는 수학1 시험이 있다. 공부를 충분히 했는가? 많이 하였는가?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분명히 공부라 불리는 무언가를 한 것 같기는 하다. 학생회관 이 층에서 기출 문제 대여섯 편을 인쇄하여, 밴드 합주가 끝나는 오후 열한시부터 카페인의 힘으로 잠을 줄여가며 문제를 풀었다. 한 번은 50점, 한 번은 70점, 한 번은 120점까지, 평균을 하회하는 점수부터 상회하는 점수까지 그 편차가 다양한 결과를 얻었고,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시험 시작까지 약 12시간이 조금 더 남은 지금, 마지막 기출문제 두 편을 앞두고 나는 문제를 푸는 대신 이 글을 쓴다.

1.

최근 ‘전공 정체성 혼란’이라 부를 만한 것을 겪고 있다. 본래의 전공인 응용생물화학이 아닌 복수전공을 지망하고 있는 언어학으로 스스로를 학문적으로 정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그저 ‘복수전공을 희망한다’ 라는 선에서 그칠 것이지만, 나는 조금은 과다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일종의 강박을 가지고 행동하는 듯하다. 공격적으로 언어학과를 전공하거나 복수전공하는 선배들, 동기들을 대상으로 인간관계를 확장해 나가는가 하면, 인문대학 2동 2층에 있는 언어학과 과방을 본 전공의 과방보다 더욱 자주 드나든다. 심지어는 매일 밤 그 옆의 조그만 라운지의 책상에 앉아 독일어 공부를 하거나 수학 문제를 풀기도 하였다.

어제와 오늘은 시험 공부를 할 시간에, ‘언어와 언어학’의 강의교재로 사용되는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을 읽었다. 청강이나 도강을 하려 했지만 시기가 너무 늦어, 교재를 읽는 것으로 타협한 것이다. 책은 기숙사로 걸어가면서까지 읽었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2.

나는 나 자신의 이러한 전공 정체성 혼란이 단순히 언어학에 한해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님을 직시한다. 여자가 되고 싶어하던 두세 살 때부터, 게임 개발자가 아닌 우주 탐사선 연구원을 자기소개서에 적었던 중학교 3학년, 천문학 동아리에 속해 있으며 생명과학을 꿈꾸던 고등학교 1학년,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 나는 정체성에 대한 배반의 토양 위에서 성장해 왔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책임져야 할 가정이 없는 젊은이들에겐, 흥미와 진로가 바뀌는 것은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리라. 그러나 나는 어릴 때부터 그 행위에 묘한 배덕감과 죄책감 따위를 느꼈다. 무언가 이전에 좋아하던, 이전에 몸담고 있던 학문이나 집단을 배신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고, ‘금지된’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 행위를 더욱 갈망했다. 은밀하고 교묘하게, 나 자신마저 속여가며 그것을 추구했고, 결국은 전환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단 하나, ‘여자가 되는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3.

만으로 두세 살부터, 초등학교 5학년 정도까지, 나는 여자가 되고 싶어했다. 왜 그런 생각을 거의 십 년 넘게 가져왔는지,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삶을 살아오며 줄곧 생각해 왔지만, 아직 정설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아마 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긴 하다.

그 계기로써 추측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나의 이름으로 인한 것이다. 성씨 ‘전’으로 인해 ‘여성스러움’이 조금 중화되긴 하지만, 다음 통계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내 이름은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름이다. (당신은 전국에 174명뿐인 08년생 남성 ‘지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koreanname.me

어린아이의 언어능력은 대다수 어른들의 생각보다 뛰어나다. 생각보다 많은 말을 듣고 이해하고 가슴 깊이 오래도록 새겨둘 수 있다. 오히려 하루에 입수하는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말들을 흘려듣는 웬만한 어른들보다 더욱 오래도록 그 말을 깊이 곱씹어보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한정된 정보를 바탕으로 필사적으로 의미를 추론할 것이다. 나는 주변인들로부터 ‘이름이 여자같다’, ‘개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고, 이름을 바꾸기보단 스스로를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했다.

두 번째 이유‘성기 만지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마 다섯 살 즈음 나는 안 좋은 습관을 두 가지 가지고 있었고, 이는 부모님과 유치원 선생님 등에게 교정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첫째는 손톱 뜯는 것이었고(이것은 아직까지도 지니고 있다.) 둘째는 성기를 만지는 것이었다. 공공장소에서까지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집에서 그러한 행동을 자주 하는 것을 부모님께서 포착을 하시고 이상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 습관을 교정하기 위해 나는 상담치료센터 같은 곳에 방문했었고(아마 ADHD 따위로 여겨졌으리라) 그 상담사 선생님에게 “나는 고추 만지는 습관이 있어요” 스스로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한다. 아무튼 부모님은 그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자꾸 고추 만지면 고추 떨어진다’ 라는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고추를 안 만지기보단 고추가 떨어져서 여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유아 자위는 많이들 관찰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더라.)​

세 번째 이유‘남자아이들 사이에서의 부적응’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마 유치원에서부터 남자아이들과는 잘 어울리기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들과 자동차 장난감이나 로봇 애니메이션 등의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며 이야기하고 놀이하기보다는, 동생과 함께 내가 만든 세계 안에서 캐릭터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접기를 하며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남자아이들의 무리에서는 별종 취급을 받아 놀이에서 내쳐지기 일쑤였고, 그들 특유의 폭력성(싸움 놀이, 전쟁 놀이 등)이나 리더를 따르는 관습 등에 적응할 수 없었다. 나는 비폭력적이고 의미있는 놀이를 원했고, 누군가를 따르거나 집단을 이끌기보단 내가 세계관의 창조자가 되어 그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원했다.

친구가 없어 외롭고, 별종 취급을 받으며 가정에서도 교정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나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의 세계를 동경했다. 막연히 이곳을 벗어나면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세계가 있을 것만 같았다. 더이상 외롭지 않게, 별종 취급을 받지 않으며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들에게 소속되고 싶었다. 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초기의 인간은 여러 면에서 초기의 인류와 유사한 것 같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하늘에 빌면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여자가 되게 해 달라고 (신으로 추정되는) 상상 속의 존재들에게 수없이 빌었다. 초등학교 2학년, 하루는 생명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여자가 되는 약’이 출시되고, 이를 먹어 여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나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허무함과 무력감을 느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저 마음속으로 비는 것을 넘어 상징적인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남성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을 배척하고, ‘여성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일종의 내면의 규범으로 만들었다. 학교에 제출하던 그림일기는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치마를 입은 것으로 그렸다. 남자들만 참여하던 축구, 야구 등의 운동을 배격하고, 남녀 모두가 놀이터에서 함께하는 ‘지옥탈출’, ‘경찰과 도둑’ 등의 놀이를 즐겼다. ‘또봇’이나 ‘터닝메카드’가 아닌 ‘겨울왕국’이나 ‘라푼젤’ 등 디즈니 공주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공주와 사랑에 빠지기보다는 공주가 되고 싶어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가 ‘Let it go’를 부르는 영상을 보고 미쿠에 빠졌다. ‘파돌리기송’이나 ‘미쿠미쿠하게 해줄게’를 들으며 미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고 당시 사용하던 ‘연아의 햅틱폰’에 영상을 넣어 학교와 놀이터에서 감상하며 ‘미쿠미쿠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가족으로부터 ‘야동을 본다’ 라는 말을 듣고, 주변으로부터 ‘친일파다’ 라는 말을 들어도 미쿠가 되고 싶었다. 나는 그저 나의 세계관에 미쿠를 편입시키고, 사진을 프린트해 입체 종이 모형을 만드는 식으로 일종의 주술적인 행위를 할 뿐이었다.

그렇게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빌고, 주술적 행위를 해서, 결국 여자아이들의 집단에 소속되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그럴 리 없다. 그들의 입장에서 나는 외부인이었다. 실질적인 성별의 차이로 인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생각해온 ‘여성스러운 것’과 실제 여자아이들의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나 공감 코드는 현저히 달랐다. 나는 아이돌 팬 문화라던지 미사여구를 덧붙인 과다한 칭찬, 눈치 교환 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그들에게 소속되는 것은 포기한다.

아무튼 초등학교 5학년을 기점으로 남성으로서의 성 정체성을 확립하기는 했다. 그 해 초반, 당시 운영하던 유튜브 채널을 매개로 ‘초딩 유튜버 커뮤니티’와 접촉할 수 있었다. 나는 부모님께 배운 편집 기술을 이용해 그들 사이에서는 꽤 퀄리티 높은 영상을 만들었고 그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았던 터라 높은 톤의 목소리로 생방송을 했고, 여성 캐릭터의 프로필 사진에 ‘사진찍기’, ‘미니어처 만들기’ 등의 주제를 다루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여자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유행하던 ‘액괴’ 문화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들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거리를 두었고, 결국 그들에게도 소속될 수 없었다. 여름 즈음 급격한 2차 성징을 겪으며, 나는 더이상 여자가 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4.

결국 실패해버린 나의 첫 번째 배반,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첫 번째 배반은 내 인생을 근본성에 대한 갈망으로 한껏 뒤틀어놓으며 평생 사유할만한 질문을 제기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인간이라는 범주는 나같은 별종조차도 포함하는 것일까. 인간은 어째서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들은 왜 이토록 다른가. 인간은 왜 언어를 사용하며 사소한 단어 하나하나에 이토록 연연하며 중요성을 부여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같은 인간을 배척하고 왕따시키는 것일까. 그런데도 누군가는 어째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온기를 전하는 것인가.

5.

나는 이 어려운 문제에서 도피하기 위해 중학생 시기 이학과 공학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했다. 자신이 천성 이과라고 생각하며 쉬는시간이면 수학의 정석과 고등 하이탑을 풀었고, 물리 유튜브를 운영했고, 페이스북 물리학 그룹이나 과학고 지망생 그룹에서 활동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배격하고 오로지 과학 교양서나 SF만 읽었다. 원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물리학만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라플라스적 세계관 속에서 환원주의를 신봉했다. C언어와 C#, 자바와 파이썬을 배워 감정 따위는 결여된 오로지 논리와 형식만 존재하는 언어로,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나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일에 열중했다.

6.

거창을 떠나고 싶었고 더욱 넓은 세계로 나가 나의 세계를 드러내어보이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 외로움을 덜고 싶었다. 코로나로 인해, 지역적 거리로 인해, 나의 어린 나이로 인해 좌절되었던 ‘해커톤 참가’, ‘컨퍼런스 참가’, ‘공모전 도전’, ‘팀 프로젝트’ 등을 마음껏 해보고 싶었다. 당시 페이스북 지인들이 다수 진학하던 안산의 ‘디지털미디어고’와, 4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진주의 ‘경남과학고’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중학교 3학년 초반 경남과학고 지원을 확정하였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였다. 나는 공학이나 코딩 따위를 배반하고 우주 탐사선 연구원이 되고 싶다고, 광막한 공간을 영원히 항해하는 탐사선을 쏘아올려 그 희미한 신호를 분석해 우주의 근본적 원리를 밝혀내고 싶다고, 그 꿈을 위해서 어떻게든 노력하겠다고 썼고 결국 합격했다. 나는 역사의 일부가 되고 싶다, 학교를 스쳐간 선배들과 그 학교를 매개로 연결되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나도 족적을 남기고 싶다 등의 생각을 하며 필사적으로 인터넷에 남아 있는 얼마간의 경남과학고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았고, O 선배의 블로그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당시 경남과학고에 진학한 가장 큰 이유는 대입보다는 인간관계에 있었다. 성적을 아무리 낮게 받더라도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자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있고 그들과 인간적으로, 학문적으로 교류하며 이전보다는 덜 외롭게 생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비소집 날 동기들을 처음 만났을 때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수학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디스코드 방을 만들어 방학 때부터 활발하게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환상은 브릿지 생활 이 주만에 거의 다 깨어진다. 중학생 때부터 두려워했던 ‘일진’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보았다. 룸메이트가 된 친구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인스타 스토리에 ‘정말 되고싶지 않았던 친구와 룸메이트가 되었다’ 라는 글을 올린 동기를 보았다. 아이돌의 외모, 여자 동기들의 외모를 평가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쏟아내며 재미있어하는 이들을 보았다. 학문에 대한 구체적인 호기심보다는 공부의 결과로 얻을 성적과 대학 입시 결과에 연연하며 ‘등급 컷’을 따지고 성적을 바탕으로 동기들을 재단하는 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분명 잘못되었음을 느끼지만 그들에게 속하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7.

나는 소속될 만한 도피처를 원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깊은 학문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리고 나를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친구 또는 연인을 원했다. 브릿지 3일차 점심시간에 함께 도서관에 갔던 L이 그런 모습일 것이라 상상했고 그를 짝사랑했다. 그는 생물학을 좋아했고 진로를 그 쪽으로 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소속되고 싶었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그와 온전히 결합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공통의 학문적인 세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자기소개서에 썼던 ‘공학’, ‘지구과학’, ‘천문학’ 따위에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진로를 걷겠다고 써서 고교에 합격한 만큼 실제로 그런 공부를 해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그 분야는 점점 지루해졌다. 천문 올림피아드 준비나 천문 동아리 활동 등에서는 의무적으로 하는 일이라는 느낌을 느꼈다. 대입을 위해서, 스펙을 위해서 하는 일같다고 느껴졌다. 나는 L의 관심 범위 안에 들고 싶었고, 그래선지 금지된 일이라고 느껴지는, 생명과학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생명과학으로의 달콤한 배반을 결심한다. 고등학교 일 학년, 그러니까 이년 전 이맘때쯤 나는 친구들이 모여있는 기숙사 방에서 하나의 선언을 한다. 더이상 천문학이 아니라 생명과학을 진로로 할 것이라고. 생명과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시험기간, 어렵기로 소문나 있던 수업 내용을 필기노트 형식으로 정리하여 복사한 후 자습실에 비치하여 친구들의 호응을 얻었다. ‘생물 동아리도 아닌데 잘 정리했다’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나름대로의 공부법인 ‘백지 필기법’을 이용해 공부하여 10등 정도의 성적을 얻었다. 예상했던 70등보다는 높아서 기뻤다. 계속 생명과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흥미로운 질문들을 탐구하고, 친구들의 질문에 대해 답하고, 세미나 형식으로 설명하기를 반복했다. L이 속해있던 ‘자연생태탐구반(자생탐)’의 이름에서 착안한 ‘생명과학 심화 탐구반(생심탐)’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열 명 가량과 함께 심화 탐구 및 발표 활동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갈 무렵, 동아리를 ‘자생탐’으로 옮긴다. 모든 부원이 남자뿐이던 기존의 천문 동아리에서의 어색함, 외모 이야기 등을 견딜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L이 있는 동아리에 소속되어 그와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L에 대한 모두 환상이 깨지고 난 이후였다. 내 상상 속의 L의 모습과 실제 L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고, 결국 그에 대한 반항심과 반발심만 품고 동아리 활동을 꾸역꾸역 이어나갔다.

8.

조기졸업이 확정된 2학년 무렵 나는 2년만에 자기소개서를 한번 더 작성해야 했다. 카이스트를 1지망 목표 대학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진로를 무엇이든 하나로 특정지어서 그 진로에 도달하기 위해 하였던 노력과 진학 후의 계획 등을 어떻게든 짜맞추어 적어내야 했다.

7월 무렵 카이스트의 뇌인지과학과에서 주최하는 과학고 대상 강연회에 참가하였고, 뇌과학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더불어 기존의 코딩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ChatGPT를 위시하여 급부상하던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흥미와, 생명과학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더욱 진로로 설정하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뇌 내에서 언어의 네트워크가 구축되는 방식이 실제 단어의 의미 네트워크와 유사할까? LLM의 구조와 뇌의 언어 처리 네트워크의 구조는 얼마나 유사할까? 등의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자기소개서를 쓰며 <괴델, 에셔, 바흐>를 읽었고, 인간 정신이나 컴퓨터, 생명의 DNA 유전자 발현 네트워크 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층위 구조에 흥미를 가졌다. 층위와 네트워크 구조가 인간, 학문, 언어 따위의 본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이주간을 자기소개서 작성에 몰두하였다. 결국 ‘유전자 발현 조절을 대형언어모델로 분석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필두로 ‘시스템 생물학자’를 진로로 하는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였고, 카이스트에 합격하였다.

9.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혹시나 해서 지원해 본 서울대 응용생물화학과에 합격한 것이다. 면접을 보러 왔을 때, ‘관정 도서관’을 처음 보고 중압감을 느꼈다. 길을 잘못 들어 방문한 옥상 정원에서 세 살 무렵 꾸었던 꿈의 장면과 겹쳐지는 모습을 보았다. 둘 다 합격하면 무조건 카이스트에 등록할 것이라는 기존의 다짐을 배반하고 서울대에 등록했다.

하필 며칠 전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로 인해 사회에서의 나의 책임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었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나 사회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인문대와 사회대의 존재가 매우 큰 메리트로 다가왔다. 물론 카이스트의 무학과 제도나 다전공 제도 따위의 메리트를 알고 있었고, 그것이 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일순간의 감정적 판단에 의해, 가족이나 선생님, 선배 등과의 상의도 없이 서울대를 선택했다.

전공은 성적에 맞추어 선택하였기에 그리 애착이 가지 않았다.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종의 강박이 있는 까닭에 자연과학대학의 생명과학부를 지망하기도 했지만, 합격 확률이 낮다는 판단 하에 보다 안정적으로 합격할 수 있을 만한 응용생물화학부에 지원한 것이었다. 그래도 기존에 생각했던 LLM을 활용한 유전자 발현 연구 쪽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과 동기들과 안면을 트기 위해 OT나 새터 등을 열심히 참가하기도 했다.

10.

그러나 어딘가에 소속되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다. 거짓부렁을 부끄러워하는 성격으로 인해, 몇 년생이라는 물음에 솔직하게 답하면, ‘술은 먹을 수 있냐?’, ‘천재냐’, ’08년생이 벌써 ㄷㄷㄷ’ 하는 반응을 보이며 별종 취급을 받는다. 천재이거나 공부를 유별나게 잘한다거나 해서 조기졸업을 한 것이 아니라, 수 번의 배반을 거쳐 우연히 이곳에 흘러들어온 것임을 아는 나 스스로는, 이러한 주변의 평가에 부담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런 기대치에 맞추지 못하면 어쩌려나 하는 불안감도 함께 말이다.

‘미팅’이나 ‘번개’ 등에 나가 술을 마시는, 흔히 일컬어지는 ‘과 생활’ 따위를 하지 않고, 독일어나 문학과 철학의 대화 따위의 교양 과목의 수업을 곱씹고, 글을 작성하고, 여러 단과대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집중했다. 수업이 끝나면 과방 대신 동아리방에 갔고, 번개 대신 독서모임에 갔다. 인스타 대신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스마트폰 대신 공신폰을 썼다.

나는 별종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별종 취급받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한편, 인간 대 인간으로 깊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그 바램을… 아직까지 내심 간직하고는 있다.

11.

전공 박람회 방문을 계기로, 컴퓨터공학, 철학, 수학을 포괄할 수 있는 언어학을 복수전공 대상으로 삼았다. 청강하는 자전거 수업이나 동아리에서 우연히 언어학과 선배와 동기들을 몇몇 만났다. 마음에 드는, 친해지고 싶은,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사람을 한 명 보았다. 나는 다시금 새로운 배반을 시작한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 너머의 세계가 과연 어떤 모습인가는 아직 자세히 모르지만, 나는 어딘가에 소속될 수 있으리라는, 진심으로 그 학문에 몰입할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하나의 희망을 품고 언어학 공부를 한다.

이젠 수학 시험이 10시간 남짓 남았다. 글을 안 썼다면 기출을 한번 더 풀 수 있었을 테지만 글쓰기를 결심한 나의 선택에 만족한다. Waltzing Matilda같은, Bohemian같은, 나의 배반들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