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길을

2025-05-12 0 By rainrose2718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엔 달빛만 나무기둥을 감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느냐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 노래를 불러본다

이규남, <진주라 천리길>

거의 삼 개월 만에 고향을 방문했다. 금요일 ‘수학 연습’ 수업이 끝나자마자 세찬 비 내리는 낡은 남부 터미널에 가서 시외버스에 올라 세시간 반을 달린 끝에, 거창의 고향집에 가서 부모님을 뵈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첫차를 타고 진주에 왔다. 전날의 흐린 날씨와 세찬 비는 온데간데없었다. 햇빛은 더웠지만 조금의 습기를 머금고 있는 바람은 차가워서 (숙소를 뚫기 위해 가져온) 두꺼운 대학 과잠을 입고 있을 수 있었다. 쨍한 원색의 하늘을 보며, 어지러운 햇빛을 맞으며, 터미널 앞의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 <진화하는 언어>를 읽으며 이십여 분을 기다린 끝에 진성 삼거리로 가는 281번 시내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는 곧바로 ‘뒤벼리’ 길을 달렸다.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달리는 그 길에서 바라본 남강은, 온통 새푸른빛으로 너울대며 한껏 태양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름의 흰빛으로 빛나는 강 건너편의 경남문화예술회관과 경상대학 칠암캠퍼스의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은 온목소리로 ‘여기가 진주다’ 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작년 이맘때 한창 좋아했던 레드 제플린의 ‘Heartbreaker’를 들었다. 버스는 시청, 한전사거리, 혁신도시, 문산읍, 국제대앞을 거쳐 조금 높은 고개를 하나 넘어서 진성 삼거리에 도착했다.

아아, 진성이구나.

진성 삼거리는 4년 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익숙했던 장소였다. 영재원 시험을 보기 위해 아버지 차를 타고 처음 방문했었고, 매주 토요일 과학, 수학 영재원을 다니며 아버지와 함께 잠시 정차해 ‘풀마트’에 들러 간식을 샀던 장소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귀교일마다 홀로 시내버스를 타고 진성삼거리에서 내려 학교로 걸어갔고, 귀가일마다 히치하이킹으로 진성삼거리로 이동해 풀마트 앞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부산으로 마산으로 여행을 다녔을 적에는 진성을 경유하는 시외버스를 이용하기도 했다. 진성삼거리는 경남과고와 외부의 세계를 이어주는, 언제나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들러야 하는 관문같은 존재였다.

히치하이킹을 할까, 학교 앞까지 가는 6번 버스를 기다릴까 고민했지만, 그냥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바람은 약해지고 날빛은 더욱 더워져서 나는 입고있던 과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중간 기착지인 ‘Blue25’ 편의점 앞에서 나를 마중나와준 친구 둘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 학교에 도착했다.

마침 열 시가 되어 학교에서는 ‘수과페’를 시작한 참이었다. 각양각색의 수과학 동아리에서 운영하는 곳곳의 체험 부스에서는 동기들과 후배들의 반가운 얼굴들이 바라다보였고, 초중학생 아이들과 그들을 데리고 온 부모님들이 뒤섞여 생기로운 모습을 자아내었다. 나는 2학년 때의 룸메이트 J가 운영하던 ‘청사진 체험부스’, 지도교사였던 정보 선생님이 계셨던 ‘모션 캡처 체험부스’ 등에 방문하여 서로의 근황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조기졸업한 동기들도 두세명을 제외하고 모두 학교에 와 있었고, 그중 몇몇과 함께 3학년실에 방문하여 2년간 함께 지냈던 선생님들께 근황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하였다. 모두들 각자의 위치에서 꽤나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나의 모습도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P 대학에 진학한 친구 O의 이야기이다. 최근 머리를 자르고 터치드의 보컬 ‘윤민’을 닮은 패션과 헤어스타일으로 나타난 그는 반 동기(P 대학은 1학년 때 무전공으로 입학하여 고등학교처럼 반 제도가 있다.)들과 친하게 지내며 MT에서 자신이 바다로 던져졌던 이야기, 서울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을 즉흥적으로 예매해 기차를 타고 다녀왔던 이야기를 내게 풀어놓았다. 다른 대학의 생활 이야기, 그의 여행 이야기와 친구들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로웠고, 반갑고, 따뜻했다.


…좋아하는 밴드와 노래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작년과 재작년의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 많은 경험을 하고자 했던 모습, 즉흥적으로 방방곡곡의 여행을 다니며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직면했던 모습,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친해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감수성의 범위를 넓혀가려 했던 모습들, 즉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려는 모습을 말이다.

나는 겨울방학부터 대학 입학 이후 지금까지 나의 깊이를 더욱 깊어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근간에는 고등학교 시기 겪었던 침체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즉 부조리는 ‘이상에 대한 집착’, ‘자신과 가족에 대한 원망’ 등을 포함한 침체기를 불러일으켰고, 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상의 필요성을 의심하기도 하고, 지엽적인 현상이 아닌 ‘본질’을 직시하자는 경구를 되뇌이기도 했으며,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글로 풀어내는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O 선배의 글의 도움을 받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언급된 ‘키치’의 개념을 파악하고, 그것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서서히 침체기 극복의 실마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대학 면접날이 가까워질 무렵엔 다행히도 거의 침체기를 극복했다고 생각했고, 두 달간의 길고 긴 겨울방학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였다. 나는 내가 침체기를 극복한 원동력이었던 ‘글 쓰기’에 집중하자고 생각하였다. 나는 책을 출판한다거나, 특정 범위를 공부한다거나 하는 뚜렷한 목표 없이 오로지 ‘글 쓰기’를 추구하였다. 나 자신에 대해 탐구하며 나의 과거를 파고 내려가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들을 캐내어 막연히 느끼던 두려움, 부끄러움 등의 원인을 밝혀고자 노력하였다

동시에 나와 유사한 과거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는 블로거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었다. 각자 자신으로써 인정받고, 서로의 현재와 과거의 모습을 존중하고, 학문을 추구하는 ‘지극히도 이상적인’ 모임이었다. 그 세계가 내 세계의 전부일 때는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나는 점차 그 세계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어디에서나 나를 솔직히 드러내면 그 자체로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냉혹한 ‘현실’의 사회를 점차 망각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고향’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새롭고 이질적인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대신 편안한 곳에서 안주하고 싶어했다.

새로 사귄 과 친구들이나 동아리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대신, 그 커뮤니티의 사람들과 이야기하기에 골몰했다. 많은 사람들과 넓고 얕게 친해지며 서로를 서서히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려고 하는 대신, ‘나와 비슷한 사람’, ‘결이 맞는 사람’, ‘그 커뮤니티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기 위해 나의 ‘특이한’ 특성을 극대화시키고 한껏 드러내며 그런 누군가가 찾아와주기를 갈망했다.

나는 ‘처음 만난 사람’과 ‘많이 친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의 차이를 망각하였고, 그것이 옳은 거라 믿었다. 완전히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술에 취한 것처럼, 어린아이같은 행동을 하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부담스럽게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그 커뮤니티’를 뛰쳐나오듯이 도망쳐나왔고, 스스로 고립을 택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서랍에 보관해 두고 인터넷이 안 되는 공신폰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에서 나의 세계를 넓혀가기보단 깊이를 깊게 하는 것에 집중했다.

깊이가 깊어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물론 어느정도는 긍정적인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너무 오래 지속되거나 심해지면 도리어 독이 된다. 나는 그 적정 한계선을 판단하는 기준이 그것이 ‘키치’인지의 여부라고 생각한다. 곧, 그렇게 깊어지는 것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면서 깊어지기를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 한계선을 넘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나의 모습이 그러했다. 처음 공신폰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필요없는 정보를 찾아보며 낭비하는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공신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며 ‘대단하다’, ‘특이하다’ 라는 칭찬을 받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는 그러한 말을 듣기 위해 그 모습을 반쯤 의도적으로 내보였으며, 그러한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신폰이 아닌 노트북으로 필요없는 정보를 찾아보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그러한 나의 모습에서 모순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이제 깊이를 깊어지게 하려는 나의 시도는 한계치에 달하기 시작했다. 그 새로움과 생명력을 잃고 이제는 진부해졌다. 다시금 넓이를 넓힐 시간이다. 대학을 발받침 삼아, 광대한 학문의 세계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의 세계로, 나의 세계를 확장할 시간이다. 변화한 세계를 인정하고, 최신 기술들을 나의 필요에 맞게 받아들이고 체득하여 세상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다. 편안한 현재에 안주하는 대신 끊임없는 노력으로 나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경쟁력을 갖추어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한 토대를 쌓아가야 할 시간이다.

…’행복의 나라로’의 가사처럼, 장막을 걷어서,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고 싶다.


‘탐구관’이라는 별관 이 층에 위치한 삼학년 합강의 중앙 복도의 양쪽에는 ‘상위권’ 대학들이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추상적인 여러 가치들을 나열한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창의, 도전, 탐구, 배려 등등… 형태없는 그런 가치들을 최대한 ‘녹여내기’ 위해 여러가지 활동을 하며 생활기록부를 기록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러 대학의 이름을 열거하며 자신을 표상하는 1에서 9 사이의 하나의 숫자가 그들에게 받아들여질지를 고민하던 우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것은 일종의 종교였다. 대학교(敎). 원하는 대학, 최대한 ‘높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으로써 고등학교를 탈출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열심히 공부하라’, ‘좋은 시험 점수를 얻으라’, ‘세특에서 진로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라’ 등을 교리로 하는 종교였다. 매년 ‘대학합격기원행사’ 라는 이름의 종교 의식을 개최하거나 ‘진로콘서트’라는 이름으로 ‘구원받은 성령’들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졸업과 합격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구원’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기쁠지 몰라도 이내 대학의 모습은 새로움을 잃고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토록 맹목적으로 ‘대학교(敎)’를 믿는 경남과학고(비단 우리 학교만의 문제는 아닐 터이다),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비인간성과 불합리성을 비판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교리를 함께 믿고 있는 나 자신에 어색함을 느꼈다. 그것을 바탕으로 인정받고자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비판함으로써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나 자신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 기억속의 그 경남과학고와 조금은 화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남과학고의 본질이 무엇인가, 대학 입학만을 위한 전초기지? 힘겨운 일과 속에 학생들을 몰아넣으며 기계적인 공부를 시키는 군대같은 학교? 물론 이들이 경남과학고의 일면은 될 수 있겠지만, 본질은 아니다. 내가 생각한 그 본질은 바로 ‘호기심을 따르는 탐구정신’이다.

호기심이란 어쩌면 삼대 욕구 다음으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욕구가 아닐까. ‘알고자 하는 욕구’. 물론 진화생물학적으로 그 욕구를 가진 이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기에 그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을 다른 개체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은 아무래도 우리네 인간이 유일하다. 즉 학문하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다.

아이일 때의 우리들은 모두 호기심 충만한 언어학자, 과학자, 문학가, 철학자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공부’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환경에서 자라나며, 사회가 제시하는 고정관념이나 상식에 굴복하며, 그 생동하던 호기심을 점차 억눌러간다. 그러나 그 싹이 꺾이지 않고 계속 자라나는 아이들은 계속 성장하여 가지를 뻗고 줄기를 두텁게 하며 저마다의 어엿한 학문의 나무를 키워내며, 결국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그 토양에서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날 수 있도록 그 씨앗을 널리 퍼뜨린다.

경남과학고는 그 새싹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조금은 혹독하지만 적당한 자극을 가해준 것이다. 같은 것을 배우는 친구들과 언제나 그날 배웠던 개념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궁금한 것이 있다면 ‘당연한 거 아니냐?’ 라는 맥빠지는 답변을 듣는 대신 각자의 언어로 이루어진 설명과 함께 새로운 질문을 담은 답변을 들을 수 있는 환경. 시험이 끝나면 (비록 ‘세특’이 목적이긴 했지만) 직접 정한 주제에 대해 진심으로 탐구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환경, 조원들과 함께 긴 호흡으로 어엿한 ‘연구’를 해볼 수 있던 환경. 비록 한창 침체기를 겪던 2학년 때는 그 환경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긴 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기억나는 1학년 때의 그 추억들이 방황하고 있는 내게 일말의 화해의 가능성을 속삭이고 있다.

나를 죽이지 않는 상처는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강해지자.

호기심을 원동력 삼아,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나가고 잎을 틔워내자.

야간 1, 2차시에는 친구 H와 3학년 3반 교실에서 수학 이야기를 하였다. 칠판에 써가며 친구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 의외로 대학에선 할 기회가 많이 없는 일이다. 너무나도 일상적이었던 그것을 오랜만에 다시 해보니 너무나도 행복했다. 내가 무엇에서 행복을 느끼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간식 시간이 되고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내게도 고향이 있다는 느낌, 그제서야 돌아보니 조금 긴 꿈을 꾸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것 같다는 느낌, 너무나도 익숙하고 포근하고 정겹고 아늑하단 느낌이 동시다발적으로 몰려온 까닭일 터이다.

그렇게 십수 분을 울다가 (친구와 이름이 같은) 지구과학 선생님의 차를 타고 진주 시내로 향했다. 9년간 경남과고에서 30대의 전부를 보내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그 ‘본질’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대빵을 하던 천문 동아리 부원들과 선생님과 함께 부푼 마음으로 천체관측을 하던 재작년 4월 밤의 옥상 냄새를 회상하며. 나의 고향, 천리길 진주와 경남과학고를 회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