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 : 정상성이라는 저-엔트로피 상태에 대한 거부

2025-06-11 0 By rainrose2718

이 글은 2025년 1학기 서울대학교 교양 강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 서평 과제의 일환으로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인간은 질서정연한 존재이다. 물리학자들의 용어로 표현하면, 엔트로피가 주변보다 낮은 존재이다. 우리는 생체 내부의 질서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온몸 구석구석 정해진 장소에 산소를 공급하는 혈관, 알맞은 위치에 연결되어 온몸의 감각과 뇌의 명령을 전달하는 신경, 의식의 밖에서 끊임없이 정보를 처리하고 명령을 내리는 뇌와 그 명령에 따라 운동하는 불수의근들이 있기에, 우리는 생각하고 글을 쓰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 하나라도 잘못 연결되거나 작동을 멈추어 원래의 질서를 벗어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통증이나 기형과 같이 내, 외부에서 무언가 잘못되는 신호가 표출되어 병에 걸렸음을 깨달은 우리는, 병원을 찾아가 원래의 질서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이 실패하여 우리의 몸이 무질서의 상태로 치닫는 것이 곧 ‘죽음’이다. 최소한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체계마저 무너진 몸은 흙, 돌멩이, 시냇물과 다르지 않은, 주변과 함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무생물 상태로 진입한다.

열역학 제 2법칙은 ‘우주의 전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는 ‘열은 항상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라던가 ‘우주는 무질서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에너지는 사용할수록 쓸모없는 형태로 변화한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해 에너지는 그 총량이 보존되어 등가 교환이 가능하지만, 엔트로피는 등가교환이 불가능하다. 어떤 계가 낮은 엔트로피, 즉 질서정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계의 엔트로피가 그보다 더 높아져야 한다는 말이다.

저-엔트로피 상태, 즉 질서정연한 상태는 기본적으로 폭력성을 내재한다. 어떤 존재가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질서정연한 존재를 무질서하게 만들어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인간은 음식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생물의 죽음을 섭취한다. 선진국은 저희 나라의 길거리와 공기를 깨끗이 만들기 위해 개발도상국에 쓰레기를 수출하고 공장을 짓는다.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고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규칙 위반자들과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그들을 혐오하고 배척한다. 방 안을 조금 더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 에어컨을 가동하고, 실외기로 뜨거운 바람을 내뿜어 밖을 더욱 덥게 만든다. 결국, 모든 질서정연한 저-엔트로피적 존재의 몸뚱아리는 무질서에 신음하며 죽어간 고-엔트로피적 존재의 시체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상성을 규정하는 것은 저-엔트로피적 존재이다. 이들은 곧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 우세를 점하여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규칙을 정한 후, 이를 어긴 자들을 철저한 무질서의 세계로 내쫓는다. 그렇게 쫓겨난 이들의 엔트로피 증가를 연료로 하여 정상 사회는 저-엔트로피 상태를 유지한다.

정상 사회는 가족의 규범을 규정한다. 성관계는 오직 부부끼리만 가능하며 아내의 자매, 남편의 형제에게는 오로지 ‘일정 수준 이하의 친밀감’만 느낄 것을 요구한다. 정상 사회는 식사의 규범을 규정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정상 사회는 ‘브래지어를 착용해야 하며 가슴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 라는 복장의 규범, ‘남편의 직장 상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는 화장을 해야 한다’ 라는 외모의 규범을 규정한다. 규범을 어긴 자는 처음에는 교화나 교육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다른 규범들까지 어겨 버린다면,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 ‘미친 사람’이나 ‘정신병자’, ‘흉악범’으로 간주되고, 정신병원, 교도소로 보내져 질서정연한 정상 사회에서 격리된다.

영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층위에서의 정상성에, 저-엔트로피 상태의 폭력성에 저항한다. 첫 번째 층위는 ‘신체’이다. 그녀는 꿈(pp. 18-19)을 꾸고, 결혼 전부터 일상적으로 행해오던 ‘육식’에 대해 낯섦을 느낀다. 고기를 갖다 버리고 채식을 선언하며 육식의 폭력성에 온몸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의식이 있고 아픔을 느끼는 동물의 죽음으로써 자신을 더욱 질서정연하게 만들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두 번째 층위인 ‘사회’에의 저항과 연결된다. 채식을 선택하며 여러 가지 암묵적 규범을 어기기 시작한 영혜는 사회로부터 교화나 교정, 치료의 대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사회에게 영혜는 그저 자신의 질서정연함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었다. 영혜는 더욱 적극적으로 무질서로의 이행을 추구하며, 사회의 정상성과 자신의 정상성에 모두 저항한다.

중요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키워드는 ‘식물’이다. 식물은 생명체 중에서도 특이한 존재이다. 식물이 저-엔트로피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의 근원은 어떠한 다른 생물도 아닌, 무생물적 존재인 ‘햇빛’이다. 식물은 제 몸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의 목숨을 빼앗거나 에너지를 착취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햇빛 앞에서 알몸으로 제 몸을 드러내보이면 되는 것이다. 영혜는 그런 식물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했다. 햇빛이 비치는 병원 앞 벤치에서 환자복을 벗고 있었던 것을 시작으로, 온몸에 꽃을 그린 형부와 섹스를 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에는 물만 먹고 햇빛을 쬐며 물구나무 서서 식물과 같이 살아간다.

영혜는 ‘젖가슴은 아무것도 죽일 수 없다’며 자신의 젖가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젖가슴은 인간에게 있어 식물과 가장 비슷한 신체 부위이다. 식물은 광합성으로 만들어 낸 양분으로 뿌리, 줄기, 잎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으며 다른 생명이 먹을 수 있는 질서의 근원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젖가슴도 식물처럼 다른 이가 먹을 수 있는 양분을 생성해내는 유일한 신체 부위이다. 젖가슴은 곧 영혜가 식물적 존재에 다가가는 것을 암시하는 시작점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비정상에 대한 폭력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저-엔트로피 상태의 정상 사회는 어쩌면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엔트로피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을 거부하는, 정신분석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음 충동’에 휩싸인 사람들이이 등장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이루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면, 그 사회의 질서는 도리어 무질서로 뒤바뀌어 혼돈의 상태가 펼쳐지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혼돈 속에서 다시 질서가 피어난다. 그 질서는 새로운 정상-사회를 규정하고 저-엔트로피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반복된다.

Q. 어쩌면, ‘자본주의’라는 것은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고 저-엔트로피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대의 가장 성공적인 거대한 생명체적 시스템이 아닐까?

Q. 식물적인 사회를 꿈꿀 수는 없을까? 착취나 폭력, 배제 없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