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30일

2025-07-30 0 By rainrose2718

언어학 개론강의인 ‘언어의 세계’ 시험을 불과 열 시간 앞둔 지금, 관악02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글을 끄적이고 있는 이유는 그저 오늘 있었던 우연적인 만남을 해설하기 위함이다.

언어학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새벽 5시에 취침한 후 12시경에 일어나 2시에 있는 샌드페블즈 합주를 가기 위해 기숙사 앞에서 관악02 버스에 올랐다. 빈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고 있었는데, 뒷문 바로 뒷자석에 탑승하신 분이 과제 보고서나 논문 따위로 보이는 종이를 넘기며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예의없게도 그 종이철을 주시하다가,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에 나타난 미학의 탐구>라는 제목을 보고 그만 말을 걸고 말았다. 처음에는 뒷모습만 보고 학부생인 줄로만 알았기에 ‘과제 보고서인가요?’ 하고 물었지만, 이내 그 분은 영어영문학과 교수님이었고 자신이 작성한 논문을 퇴고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어보았냐는 교수님의 질문에 나는 그저 “읽어보지는 않았고 들어는 보았다”라고 답하였다. 연락처 교환을 한 이후에도

“영어영문과인가?”

“농생대 소속입니다”

“영문과 수업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직은 없지만 들어보고 싶습니다”

등의 문답이 오고갔다.

나는 본래 농생대와 더욱 가까운 신소재 정류장에 내리고자 했지만, 교수님께서 버들골 정류장에 내리시는 것 같아 나도 학생회관의 교보문고에 박술 시인의 시집 <오토파일럿>을 사러 간다는 명목하에 버들골에서 내려 교수님과 얼마간 이야기를 했다. 나는 영문과에 대해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내뱉었다.

“영문과에서 밥 딜런에 대해서도 뜨겁게 다루어지는 편인가요?”

교수님은 답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후로 관련 논문도 자주 쓰여지고, 수업에서도 꽤 다루어지는 편으로 알고 있다. 특히 영어시학에서 말이다.”

그렇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열렬히 사모하였던 밥 딜런 그를 아직까지 사모하며 그의 시와 음악에 감동을 받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영문과 강의도 꼭 수강해볼것이라는 다짐을 하며 “안녕히 가십시요, 저는 학생회관 쪽으로 갑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교수님과 헤어졌다. 언젠가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을 읽게 된다면 그 교수님께 꼭 메일을 써 볼 작정으로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 교수님께 말을 걸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운명의 장난의 결과일 뿐이다.

때는 어떤 쨍한 유월의 한낮으로 돌아간다. 나는 그로부터 며칠 후 있었을 S군과의 자전거 여행 약속을 위해 신림동의 삼천리 자전거포에서 헬멧을 구매하였다. 날이 한가하여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중, 삼 월에 문학소년 J군과 함께 갔었던 ‘그날이 오면’이라는 서점이 생각났다. 철학, 사회학, 문학 등 인문학 서적으로 점철된 그 서점에서 나는 기형도 시집을 구매했었으며 꽤 좋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그 서점에 들러 여러 책들을 읽어보았으며, 아무것도 안 사고 나가기는 예의에 맞지 않는 듯하여 흥미롭게 읽었던 ‘나쁜 책: 금서기행’ 이라는 책을 구매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 성적,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었던 책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오히려 권장하는 책이었다. 이만원에 달하는 책이었지만 구매한 이유는 그때의 나는 경제감각이 없었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라면 그정도의 돈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몇 십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 읽어버리고 덮어두었다.

거기서 소개된 책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책이 바로 그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이었다. 비극으로 점철된 흑인 사회에서 친구가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백인들처럼 ‘가장 푸른 눈’을 갖고싶다고 간절히 기도하는 흑인 소녀의 이야기… 너무나도 끔찍하고 폭력적인 가난과 외모규범에 저항하고 꿈을 가진다는 단순한 성장서사가 아니라 그것을 내면화하여 끔찍이도 순수하게 ‘푸른 눈’을 원한다는 서사가 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더욱 현실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언젠가 그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였지만 도서관 자료현황을 조회해 보니 몇 달간 대출중이라고 했고 일단은 다음 기회로 넘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버스에서 만난 처음보는 교수님께 말을 걸 수 있었던 용기에 대한 변명은 이 정도로 하고,

아무튼 언어학 시험이 열 시간 남은 지금으로 돌아오자.

S군과 저녁을 먹고 골목에 있는 ‘세상과 연애하기’라는 책방에서 언어학 공부를 마무리한 이후(몇백 장에 달하는 PPT 정리를 대략 네 시간 만에 해치웠다!) 서울대입구역을 향해 걸어나왔다. S군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읽기를 막 마친 참이라 여운에 젖어 있었을 것이고 나는 몇시간 동안 무언가에 몰입했던 여운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우리는 몇가지 형식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와 S군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전철역 승강장으로 카드를 찍고 들어갔다.

이내 S군의 방향인 내선순환 열차가 곧바로 들어와 헤어지고서는 몇분간 신대방역을 달리고 있는 외선순환 열차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막연히 밥 딜런의 <Love Minus Zero / No Limit>의 가사 첫 소절을 떠올렸다. My Love, she speaks like silence. 과연 침묵처럼 말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화용론에서 배운 대화의 격률과 함축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이내 몇년 전 그 가사를 직접 번역해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블로그에서 그 글을 찾아보았다. 언어의 무한성과 의미의 의미에 관해 생각하던 고등학교 1학년 겨울의 나를 발견하였고 나의 생각이 그 즈음에 정체되어있지 않도록 하나의 생각에 갇혀있지 않아야겠다는 상념을 하였고 이내 도착한 한산한 전철에 몸을 실었다. 아직은 한국 문화를 잘 모르는 것 같아 보이는 외국인 여성분께서 노약자석에 앉아 계셨다.

그렇게 몇 분 후 낙성대역으로 돌아와 4번 출구로 향했고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손잡이에 몸을 기대여두고 몇가지 상념을 했다.

과연 나의 문체를 다른 사람들도 아름답다고, 의미있다고 생각하고 감동받을 수 있을까? 내가 사용하는 언어학적, 수학적, 이학적 전문용어,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밥 딜런의 가사, 길게 늘어지는 예시들 탓에 길어지는 문장, 나의 특유의 접속사 사용법과 비유표현들 등을 읽은 다른 사람들도 즉각 어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과연 그 느낌이 내가 느끼는 것과 일치할까?

어쩌면 이는 모든 문학작가들이 공유하는 생각 아닐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다다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합평회를 하고 평단에 심사를 맡기고 교수의 평가를 받고 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가상의 인물을 만들고 그의 경험을 추적하는 소설작가와,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것만 쓰는 나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

일단은 글을 쓰는 것이 먼저다.ㅡ라는 생각을 하며 습하고 후덥한 낙성대의 밤공기를 지나 관악02번 버스에 올라 노트북을 펼쳐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