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본질에 관한 생각
대치동은 사회학적 연구 대상으로서 가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물론 나는 사회학자가 아니다. 그저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동네이다. 최근 이 동네에 관한 영상 몇 가지—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나 ‘대치동 키즈’들이 자신의 우울증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영상 등—를 보며, 중고교 시기, 그리고 현재까지 가지고 있는 나의 공부에 대한 가치관 하나를 되새겨 보았다. 많은 친구들과는 꽤 달랐던 것 같아서, 글로 옮겨 볼 가치가 어느 정도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것은 ‘공부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명제이다. 그러니까, 공부나 학업의 목적을 ‘시험 성적’이나 ‘대학 입시’ 따위가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곳에, 즉 ‘지식과 지혜의 확장’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의심했다. ‘이 시험 점수가 나의 실제 실력을 대표할 수 있는가?’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하나 해 보자. 기하 실력이 더 좋은 A가 있고, 미적분 실력이 더 좋은 B가 있다. B를 내심 편애하는 어떤 수학교사는 내신 시험지에서 교묘하게 미적분 문항의 점수를 더 높게 배점하였고, 시험 결과 B의 점수가 더 높게 나왔다. 이때 과연 A는 B보다 수학 실력이 떨어지는가?
나는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오는 경우, 부족한 부분이나 몰랐던 부분이 있으니 ‘역시 더 공부해야겠구나’ 생각했고, 성적이 좋게 나오는 경우에도 ‘이 점수는 나의 실제 실력을 대표하지 않는다. 시험에서 출제되지 않았지만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항상 겸손하고 경계를 놓치지 말자’ 라고 생각했다. —물론 항상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이상에 가까운 것이다. 좋은 점수를 받고서 안일한 만족에 젖어 공부를 소홀히 했던 때가 많았고, 좋지 않은 점수를 받고서 왜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하고 좌절한 적도 많았다.
자연히 ‘주술적인 것들’을 경계했다. ‘적중률 높은 학원 자료’나 ‘찍기 스킬’ 등, 주변에서 들려오는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공부 방법들을 배척하였으며, 시험 결과와 ‘등급 컷’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안도하거나 아쉬워하는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 않은 활동을 한 것처럼 교묘히 꾸며내 대학이 좋아할 만한 생활기록부를 만드는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본질인 ‘지식과 지혜’이므로, 나는 나만의 주력 공부법이었던 ‘백지 필기법’과 ‘개념정리 후 문제풀이’를 고수하였다.
본질에 집중한 결과—물론 아직 나는 인생을 다 산 것이 아니므로, 결과 따위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중간 점검을 하자면— 학업 면에서는 꽤나 만족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생년 기준으로 보통보다 2년 빠르게 대학에 진학하였고, 대학에서도 (1학기 기준) 꽤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의심한다. 과연 그 성적이 나의 학업의 본질인 ‘지식과 지혜’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가? 한정된 과목, 한정된 인원과의 비교가 나의 지식과 지혜의 수준을 표상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물론 그럼에도 가끔은, 아니 꽤 자주, 나는 1학기 성적을 되새기며 안일한 만족에 빠지고 공부를 게을리할 때가 많다.
결국,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가치인 ‘지식과 지혜’의 수준은 그 누구도 표상하거나 수치화할 수 없다. 성적이니 IQ니 하는 것들은 모두, 그것의 극히 일부만을 도려내어 조물조물 변형해 ‘운’ 몇 숟가락 얹어 내놓은 것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 가치를, 본질적인 가치를 어떠한 기준으로도 완벽히 평가할 수 없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도 완벽히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서 그것을 더욱 갈고닦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면 되는 것이다.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학 문제를 풀고,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지혜를 갈고닦을 수 있는 방법으로, 친구들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하거나, 멀리 여행을 하거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지식과 지혜에 가까워지는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으며, ‘유일하고 필수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조금씩 수렴해갈 수 있는 ‘느리고 힘든 방법’, ‘운좋게 빠른 방법’, ‘몰입하며 즐길 수 있는 방법’ 등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자신을 믿되 항상 의심하기, 그것이 내가 지켜왔고 지켜나갈 잠정적인 삶의 가치관인 것 같다.
지식과 지혜는 하나의 방향성에 관한 결의는 될 수 있어도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도덕은 실존에 앞서지 않으니까요.
공부에 대한 의미 부여에는 여러 방도가 있습니다. 글에서 언급된 것처럼 시험 성적이나 대학 입시라는 정량화된 지표, 그리고 이 지표로부터 기원하는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인식의 지평선을 넓혀가는 어떤 의식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요.
어느 쪽을 택하는가, 그것은 원래부터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처지도 되지 못합니다. ‘본질’을 추구하겠다고 외친 수많은 철학자들은 굶어 죽었고, ‘실리’를 추구하겠다고 외친 수많은 학자들은 소설 《모모》의 회색 인간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어느 한 쪽만을 택하기에는 다른 한 쪽이 우리에게 외치는 바가 있고, 바로 이 사실이 우리를 주저하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온전하게, 양 측면에게 고루 가치를 부여하는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오히려 제게 필요한 댓글이었다고 봅니다. ‘본질(여기에서는 실존적인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그 자체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죽지 않는, 순수한 학문적 열정)’을 추구하는 여정에서 역으로 심각한 실존적 붕괴 위기외 비가역적인 상처를 받은 저는, ‘실리’만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었고, 누구보다도 ‘살기 위해, 대입을 위해’ 공부하는 것과 능력주의에 편승하게 되었다 여기며 자책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사람이고 한계를 가진 이상 공부에 대한 의미 부여는, 무조건적인 학문적 열정도, 열정을 부정한 채 실리만을 추구하는 길도 아니라 봅니다. 결국은 사회적 인정도, 스스로의 열정도 아우르는 길이 공부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변증법에 대해 잘은 몰라 조심스럽지만, 일종의 변증법적 구조를 띠기도 하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