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月 28日 (土)

2024-09-28 Off By rainrose2718

내가 만든 키치

시험이 이틀 남은 토요일이다. 작일의 그 뜨거운 열정은 포스팅 버튼과 함께 사라지고 시험의 의미에 대한 의심과 권태가 내 곁에 남아 오전과 오후차시를 무의미하게 보내고 지금 오후 이 차시, 쫓겨가듯 친구들 곁을 벗어나 일 층 R&E실 맨 안쪽 방에 와 있다.

인간은 결국 선택의 동물이다. 본능이 결정하는 호르몬의 농도에 따른 무의식적인 선택 뿐 아니라, 때로는 이성적으로 때로는 감성적으로 사고하며 자신이 할 일을 선택해 나간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선택 기준은 익히 두 가지가 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어릴 적부터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성실하고 부지런한’ 이라는 수식어는 결국 수동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체제에 순응하며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이를 포장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하고 싶은 일’은 어떨까? 물론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마저 의무를 드러내어 버렸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은 내가 직접 만들어낸 ‘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과연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끌리는 일’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이라도 몰입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들이 ‘나의 인식으로 만들어진 현실’에서 불가능할 것 같다고 지속적으로 그 생각마저 억누르는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일 주일 전의 나에게는 ‘이발’이 그랬고, 어제의 나에게는 ‘블로그 쓰기’,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바로 이 일기를 쓰는 것이 그 끌리는 일이었다.

점심시간에 진자실에서 체스를 두다가 문득 생각난 O 선배의 블로그를 읽었다. 근래 몇 일간 글이 없길래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불과 사일 전 올라온 따끈따끈한 일기가 하나 있었다. 자살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과정을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할 것이 생겼다’ 라며 슬퍼하는 것과, ‘염세주의적’ 보컬로이드 노래를 듣고 있다는 내용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특히 입학하기 전부터 롤모델로 삼아왔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나는 그 「최면술사」라는 노래에 대해 보컬로이드에 도가 터 있는 H에게 물어보았고, 다른 짧은 글이 올라와 있는 것이 있나 보기 위해 ‘chalkboard‘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끝없는 생각을 이어가게 한 원인인 그 글 하나를 보았다.

방금 H에게 민코프스키 다이어그램에 대해 설명하고 왔다. 역시 진심으로 재미있게 공부한 것은 설명이 잘 된다. 심지어 설명을 잘 한다는 칭찬까지 받았다. ‘나와 네가 다르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과도한 의미부여보다는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것을 좇자는 것을 다시금 생각했다.

밀란 쿤데라는 기존 미학에서의 ‘키치’의 의미—저급한 형식예술—을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로 확장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의미를 부여해 해석하게끔 하는 그 현상을 ‘키치’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가정에서, 학교에서 수많은 키치 속에서 살아왔고 나 스스로도 여러 가지 키치를 만들어 실제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했었다. 가장 최근 내가 부여한 키치는 ‘락 음악은 감동적이다’ 라는 것으로, 어떤 것이든 락 음악과 관련이 있기만 해도 감동을 받고 그것을 추구했다. 만일 그것이 나와 맞지 않는 것이라 해도, ‘락 음악을 좋아한다’는 키치에 따라 나의 모습과 행동을 그렇게 바꾸려고 하였다. 사실 내면적으로는 실제로 즐기고 있지도 않았고 겉으로 보았을 때 어울리지도 않는데 그저 키치를 좇기 위해 기숙사 방에서까지 기타 연주를 하고 장발을 한 것이었다.

일주일 전의 이발은 돌이켜보면 그 키치를 극복한 일이었다. ‘팔 개월 동안 길러왔기에 그 시간이 아깝다’며 매몰 비용에 집착하지 않고, 나의 외모, 사회적 인식, 편의성에 따른 실리를 택한 것이었다. 금일에도 ‘시험 기간이면 응당 시험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키치를 내려놓고 일기를 쓰고 있다. 집중 안 되는 시험 공부를 하는 대신 나의 생각을 글로 현상하고, 우연적으로 H에게 시공 도표를 설명할 기회까지 얻었다.

키치를 완벽히 극복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키치가 있고 그저 정도가 다를 뿐이다. 종교나 이념같은 키치는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하였고, 현대의 과학 기술에 대한 키치는 어찌되었든 우리의 삶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키치를 의심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키치든 그렇지 않은 키치든 받아들이기 전에 ‘이것은 키치가 아닌가?’ 하고 의심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키치를 의심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러웠다. 스포츠 경기에서 어떤 팀을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왜 응원해야 하지?’ 라고 생각하며 그저 묵묵히 서 있거나, 연극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정체성 —나이, 성별, 직업 등이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오글거려’ 연극 수업이 있을 때면 항상 부끄러워했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일본 불매운동의 광풍 속에서 혼자 ‘이건 옳지 않다’며 의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나는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공감대 형성하기, 지지 받기, 이야기 전달하기 등 의사소통 능력의 부족을 실감했고, 내가 이렇게 된 원인을 부모의 양육 방식에 돌리며 그들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었다. ‘사상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 되지 말자, 본질을 직시하자.’ 이는 곧 ‘내가 만든 키치를 의심하라’ 와 동치였다. 나는 그동안 사회와 타인의 키치는 비판적으로 의심하고 받아들이는 한편, ‘내가 만든 키치’는 그토록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키치 중 ‘자신만의 것을 추구하라’ 라는 키치를 따르며, 중학생 때는 ‘전자기기’, 고1 때는 ‘락 음악’, 올 초봄에는 ‘한창기’, 여름에는 ‘H’ 라는 키치를 따라왔던 것이다. O 선배처럼 되고 싶다는 것도, 하나의 키치였다. 나의 일기들은 곧 ‘키치 집합소’라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만일 내게서 유래한, 타인에게서 유래한 모든 키치를 의심하고 명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면 나는 날카로운 달변가가 되었을 지 모르겠지만, 타인의 키치만을 의심하고 내 키치는 수용한 결과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이’가 되어 버렸다. 오늘 H에게 카카오톡으로 「최면술사」의 노래 해석을 물어보았을 때 ‘곡 내부에서만 해석하고 현실 세계와 연관짓는 것을 꺼린다’ 라는 말을 들었던 것처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과 연결된 핵심만을 파악해 나의 사상을 결부하지 않고 최적의 설명을 내어놓는 연습을 하면, ‘내가 만든 키치’도 의심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결국 ‘키치를 의심하라 곧 자유인이 될 것이니’ 라는 명제도 하나의 키치일 수 있다. 나의 생각, 내면과 외부 환경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않고 질문을 거듭해 나간다면, 진리를 얻는 것까지는 아닐 지라도 조금의 행복과 만족감, 후련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의미 부여 좀 그만하자. 내가 느끼는 키치에 의한 감동을 다른 사람도 느낄 거라 생각하지 말고, 보편적으로 ‘끌리는’ 것에 대한 감동을 추구하자.

P.S

나의 일기는 초반에는 ‘키치에 대한 찬사’, 중반에는 ‘키치에 매몰’, 후반에는 ‘키치를 극복’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도 과도한 의미 부여, 즉 키치인가? 일단 화학 공부를 하자.

이 차시에 학교 역사관에서 과거 교육과정 계획서를 읽었다. 학생의 거주지와 부모의 직업, 학력을 통계한 자료가 인상적이었다. 농업인이 대부분이라는 것도 신기했다. 사십 년 만에 새삼 많이도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