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사회를 위한 담론들

2025-01-25 Off By rainrose2718

흄과 스미스로부터 시작되는 공감 이론 속에서 논의의 핵심은 공감의 문, 즉 승인과 불승인의 원리와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각종 기제 혹은 기준들이다. 공감의 문을 통과하기 전까지의 감정과 의사의 교환은 공감이라 하지 않고 거래라고 해야 적절하다. 공감이 아닌 거래가 인간관계의 기본이 되는 사회가 언제부턴가 사회규범의 구성과 작동원리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야수사회가 된 것이고, 우리는 사자우리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 300년 전 태어난 스미스의 경고였다.
그런데 그 경고는 현실이 되었고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런 야수사회의 정당화 논리로 스미스가 자주 인용되고,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 인간은 본래 이기적 존재라고 했다는 스미스의 언급이 어느덧 스미스 이론의 대부분을 덮어버리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스미스와 그의 지적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흄의 이론 속에 공감의 문을 언급하는데 공통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 ‘자기의 이익’이라는 오늘날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기본원리라고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이다.
흄과 스미스 모두 공감의 문을 열고 타자와의 공감을 형성하는데 첫 번째 배척해야 한다고 지목한 것은 자기의 이익이었다. 18세기 자본주의의 활발한 성장기에 적극적인 자기 이익의 추구는 당연하고도 바람직스러운 개인과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했어야 할 것 같지만 그 위대한 두 사상가의 생각은 달랐다. 인간의 이기적 욕구가 사람간 소통과 거래를 활성화시키고, 적극적인 목적추구 활동을 자극함으로써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원천임에는 분명하지만 자기 이익 추구가 곧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 욕구의 하나이고, 행동의 동기로서 적정한 수준에서 절제되고, 제어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공감의 문을 열고 인간의 도덕감각의 기준으로 제시된 것이 타자와의 교감, 공익 정신, 그리고 사회적 정의였다. 비록 그 구성과 작동방식에 대해서는 흄과 스미스는 다른 입장을 견지했지만 승인과 불승인의 기준 자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타자의 의견과 감정, 그리고 타인의 입장이 교감과 소통을 시작하는 계기이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도덕감정이 공감의 최종적 기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이 타자와의 교감과 소통의 시작이며 그 소통의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기준은 무엇인가?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이고, 공무원들은 규정과 절차이며, 언론은 국민들의 알 권리라고 포장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명분들이 어떤 특정한 한 이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야수사회이다. 그 특정한 이념이란 바로 ‘자기 이익’이다. 공익과 공정함, 그리고 국민들의 알 권리로 위장되어 있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었다는 것이 수없이 확인되고 있지만 그래도 선량한 이 시대의 서민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이웃이 고통스럽고 불편하다고 외치는 것은 그 자체가 실존의 요구이다. 상대방에게 대응을 요청하는 몸부림이다. 그 안타까운 몸짓에 나와 우리 사회는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이들의 공동체의 당연한 모습이다. 그런데 법과 규정을 이유로, 관례와 다른 이들과의 형평성이 어떻다는 이유로, 정부의 재정과 예산이 어렵다는 이유로, 조직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그 몸부림을 묵살하는 것은 공감이라는 인간의 본유적 감관이자 공동체의 기초 시스템이 퇴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황선, 『공감사회를 위한 담론들』, 건국대학교출판부, 2023, pp. 218-219

공감을 하다가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들이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고 공동체 내에서 오해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적극적이고 일상적으로 공감을 실천하는 이들이 겪는 아픔과 고통에 조언을 하는 서적들이 적지 않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지만 희망스러운 단면도 있는 듯하다. 공감을 시도해보고 실천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희망적이고, 이들 중 상당수가 오히려 상처받고 공감에 대해 회의적으로 돌아서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공감을 실천하는 이들이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상처받는 것이 아프고 두려워서 자신에게 있는 공감의 감관을 숨기고 사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그리고 조직 내에서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하는 이들을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공감의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조직 내에서 공감하는 이들은 보통은 말이 많다거나 오지랖이 넓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조직의 사려 깊은 관리자들은 이렇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향후 조직관리의 중요항목으로 삼아야 할 의미 있는 리스트를 만들어가야 한다.
무엇보다 공감하다 상처받는 이들은 자신을 남들에게 없는 능력을 가진 이들로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들은 공감에는 상대방은 물론 자신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는 있다.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과 형편에 뛰어들어 감정적으로 함께 해주는 방식의 공감(Humean)도 필요하고, 한걸음 떨어져서 상대방의 감정을 읽고 이해하면서 정서적으로 함께 해주는 공감(Smithian)도 필요할 수 있다. 그 어떤 경우라도 내가 상대방보다 낫다거나 우월하다는 생각 혹은 위에 있다는 생각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은 서로 간의 ‘비슷함과 가까움의 심리적 공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한쪽은 들어주는 이, 또 한쪽은 말하는 이의 구도는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상담하는 모습이지 공감하려는 이들의 모습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상대방이 쏟아내고 있는 아픔과 혼란의 경험이 바로 내 것이었으며, 나 또한 그 방황 속에서 어찌할 줄 몰랐던 것을 인정할 때 나와 상대방 사이에 비슷함과 가까움의 영역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상대방도 분명 지금의 내가 느끼는 안정감과 평안함, 그리고 여유의 시간들을 갖게 될 것이며 지금의 나만큼 아니 그 이상 또 다른 사람과 진심으로 함께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회와 조직에서 나와 상대방의 위치, 책임과 권한의 차이, 나이의 차이는 ‘지금’, ‘여기’라는 역할극 속에서의 배역 차이일 뿐 상대방과 나는 동일한 인격체로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 함께 숨 쉬는 상대방과 서로의 인생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강의실로 들어가는 선생은 뭔가를 가르치러 들어가는 것 이전에 수십 명의 전혀 다른 인생들과 설레이는 만남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만남으로 시작되는 강의가 영업행위와 다른 점일 것이다.
선생의 입장에서, 선배라는 위치에서, 상사라는 자리에서, 상대방이 선망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말해 줄 수 있는 메시지는 이미 구글과 유튜브에 넘쳐난다. 그렇게 뻔한 마음으로, 흔한 메시지를 반복하면 듣는 사람들은 듣고 있는 척을 할지 모르지만, 나중의 결과는 말한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으로 끝난다. 할 만큼 했는데, 해줄 만큼 해준 것 같은데 돌아오는 것은 형식적 반응이거나 심하면 원망이다. 실패한 공감이고 상처만 남긴 공감이다. 답을 찾아 말해주기 전에 눈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 흄과 스미스의 공감이론에서 너무나 반복적으로 언급된 것이지만 결국 삶 속에서 너무나 쓰라린 경험을 하고 실패를 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잃어버린 후에 그렇다.
공감하는 이로써 상대방과 조직 내에서 인정받으려는 생각을 비워내야 한다. 스미스가 말한 대로 타자와 공감함으로 내게 돌아오는 내면의 기쁨과 행복은 나만의 내밀한 것으로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며 가까운 호흡을 함께하게 된 것은 상대방이 나를 청했기 때문이겠지만 상대방이 또한 마음을 허락해줘야 나의 진심이 상대방에게 가닿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의도는 그 누구보다 상대방이 가장 예민하게 인지할 수 있다. 개인들 사이에 그리고 사회 내에 수많은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데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처방 역시 소통이다. 그럼에도 이 많은 소통의 노력과 약속이 허사로 돌아가는 이유는 저마다 자기중심적인 계산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이익을 품고 시도하는 것은 공감이 아니라 거래이고 서로 뻔히 알고 주고받는 상호 간의 기만이다. 이타적인 행위와 공감의 노력도 결국 이기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 근거로 흄과 스미스를 언급하는 연구들도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흄과 스미스가 상정한 공감에 관한 이론 속에서 이해관계가 개입된 공감이란 그 자체만으로서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의도를 했던 그렇지 않건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얻으려는 동기가 개입된 공감은 허탈감과 후회로 되돌아올 뿐이다. 그래서 항상 살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근심과 관심은 나와 상대방과의 접속 그 자체로만 서로에게 로그인되고 유지될 수 있을까?
자기 스스로 순수한 공감을 확신할 수 없을 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상대방을 대하는 내 마음에 자신감과 조급함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나와 함께 하는 상대방의 어려움을 내가 해결해줄 수 있을까? 내가 고득점을 알려주는 족집게 입시상담가가 아닌데 공감의 이름으로 서로의 눈에 비친 눈부처를 마주하고 있는데 어떻게, 얼마나 빨리 만족스러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상대방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조급함은 공감의 과정 속에서는 큰 방해가 된다. 공감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조직 내에서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만이 공감의 주체가 아니라 제3자와 조직 자체도 공감의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 이외에 다른 이들도 나와 너가 대화하는 주제 속에 포함된 이들이다. 공감하는 이들은 이들 모두를 감안해야 한다. 공감하되 상대방을 너무 급하게 이해하고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공감으로 인해 상처받는 이들에게 가장 흔한 공통점이다.
적극적인 공감의 시도는 고맙고 칭찬받아야 하는 일이지만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고 나의 의지와 감정만을 앞세우는 것은 공감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공감의 감관은 나에게도 있고, 상대방에게도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흄의 공감이론은 열성적이고 뜨겁지만 그의 이론 속에서도 상대방의 동기를 인지하고 공감의 창문이 열리는 신중한 과정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나에 대한 상대방의 공감의 시작을 인지했을 때 상대방의 감정변화와 태도가 어떤 의미인지,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흄의 이론 속에서 상대방의 감정과 태도에 담긴 동기를 인지하는 것은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지만 이는 나와의 관계, 즉 내가 느끼는 나와 상대방과의 유사성이나 인접성이 밀접한 경우에 가능한 것이다.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유사성이나 인접성이 밀접하지 않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조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감정이나 태도, 행동에 담긴 동기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하게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너무 성급하게 상대방을 이해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속단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열린 태도로 감정과 태도 변화를 보어주었을지언정 나의 공감의 진전은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한다.

강황선, 『공감사회를 위한 담론들』, 건국대학교출판부, 2023, pp. 219-220

모든 인간은 부분동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자신과 동형 관계에 있는 부분을 찾아내어 직관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어 직관적으로 상대방을 배척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자신과 달라 보이는 상대방의 특성이 결국 자신의 어떤 특성과 동형관계에 있다고 인지하는 것은, 즉 한 단계 높은 층위에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은 직관을 넘어 이성적인 사고, 즉 ‘이해’가 필요한 일이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대방을 불쌍한 치료의 대상이라고 여기며 동정하고 연민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하나의 인격체임을 인정하고 상대의 시선으로 내려와 마주하는 일,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이고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단순히 악인이나 교화의 대상으로 치부하는 단계를 넘어 그러한 사상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며 따뜻한 관심을 건네 보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층위를 오가는 사고, 즉 ‘이해’를 연습한다면 언젠가는 익숙하게 이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건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는 분명 더욱 아름답고 따뜻하게 변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