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 여행기
‘등잔 밑이 어둡다’ 라는 속담이 있다. 사방 팔방을 찾아헤매던 것이 실은 가까이에 있었을 때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내가 가고 싶었던 장소, 읽고 싶었던 책, 듣고 싶었던 음악,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곳을 떠나기 고작 이틀 전에서야 알아차렸다.
<도덕적인 AI의 필요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하고 3시 즈음 잠을 잤다. 경남과학고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K 선생님께서 생기부 작성을 위해 제출한 탐구 보고서를 보고,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며 400바이트 정도의 내용만 작성해 주셨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을 조금 적게 잔 관계로 머리가 아파 오후 세 시까지 집에서 모바일 기기를 보며 방랑했다. 네 시즈음 되어 어떻게든 밖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돌아오신 아버지의 차를 타고, 면 소재지로 외출을 감행했다.
본래는 동네 이장님이 운영하시는 ‘잡지 박물관’에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바로 옆 복지관 2층에 새로 생긴 ‘작은 도서관’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그곳을 먼저 방문해 보았다. 시설은 기대 이상이었다. 장서 4천 권 가량과 열람석 16석 정도가 있었고, 최신식의 인테리어로 단장되어 있었다. 어림잡아 경남과학고 도서관 ‘혜윰 마루’의 오 분의 일 정도의 규모인 듯 하였고, 적당히 조용하고 쾌적하여 글 쓰거나 책 읽기에 딱 적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토록 이러한 공간을 찾아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나는 이토록 좋은 공간을 어째서 모르고 있던 것일까. 떠나기까지 이틀 남은 이 순간에서야 알게 된 것일까.
나는 홀로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사서 선생님과 삼십 분 가량의 대화를 나누었다. 고등학교에서 수십 년간 근무하다 퇴직하신 후 몇 주 전부터 이곳에 오셨다는 사서 선생님은 도서관을 활기차게 만들고 싶어하셨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 모임, 근처 어린이집 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책 읽어주기 프로그램 따위를 계획하고 설레어 하셨다. 도서관 간판이 너무 작아 홍보가 잘 되지 않는 것 같다며, 팜플렛 제작, 블로그 작성 등 다양한 홍보 방법을 구상하고 계셨다. 나는 너무나 늦게 이 작은 도서관을 알게 된 까닭에, 사서 선생님의 그 꿈에 동참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소멸하는 면단위 지역에서의 교육 정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학생 수 대비 많은 예산을 지급하는 ‘작은 학교 살리기’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 현장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실정에 맞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큰 학교에서는 기존의 친구 무리와 틀어져도 마음 맞는 친구를 찾아 떠날 수 있는 학생이, 작은 학교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친구 무리와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큰 아픔을 겪을 것이기에, 읍내의 큰 학교로 통폐합하거나, 작은 학교끼리의 주기적 교류회 따위를 개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다. 사서 선생님께서도 위천중학교에 근무할 적의 기억을 이야기해 주시면서 공감하셨다. 한 학년에 일곱 명이었던 기수에서, 가정환경이 불우했던 한 쌍둥이가 담배꽁초를 주워서 피우는 일탈을 하기 시작하자, 그것이 그 학년 전체에 보편화되었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외되었기에,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변두리 지역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사람의 고통, 나의 동생의 고통을 문득 떠올려보며,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추거든 어디에든 그 고통을 증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잡지 박물관에 찾아가 보았다. 정확한 이름은 ‘작은 책방’으로, 창간호 잡지 이천오백여 권과, 여러 학교의 교지들, 여러 지역의 향토문학 잡지들, <사상계>와 <창작과 비평> 십수여 권을 전시하는 곳이었다. 작년 일 년동안 부산, 진주, 서울의 헌책방을 찾아 헤맨 끝에 ‘서울책보고‘에서 비닐에 포장된 채 삼십만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판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했던 <뿌리 깊은 나무> 창간호도, 이곳에서는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무엇에도 싸이지 않은 채 <샘이 깊은 물>과 함께 책꽂이에 놓여져 있었다. 책방 주인이신 이장님은 옆집에 거주하고 계셨기에,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해야 들어가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어제와 같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며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하셨기에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은 위천초등학교 쪽으로 옮겨갔다. 초등학교로 올라가는 익숙한 언덕길 초입에 있는 구멍가게인 ‘금강 상회’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어 섰다. 네시 반 즈음 방과후 수업까지 마치고 하교하면 오륙십 명에 달하는 전교생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이백원 오백원 하는 간식을 사먹고 나눠먹던 장소였다. 오 학년 때 오십원 하는 알사탕 다섯 개를 사서 맹물, 소금물, 설탕물, 탄산음료 등에 녹이고 완전히 녹는 시간을 측정하는 과학 탐구 수행평가를 한 적이 있다. 그 알사탕을 산 곳이 이곳이었다. 아이들에게 정겹게 인사하며 돈을 받는 주름이 자글자글하신 주인 할머니가 어렴풋이 떠오를 듯도 하였지만, 안에 들어가 계시는지 외출하신 건지 주인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문이 열려 있었으나 들어갈 엄두는 내지 못하고 그저 안쪽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다행히도 아예 폐업하지는 않은 듯 여전히 각양각색 불량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은 누각과 비료 창고 등이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자 위천초등학교 교문에 도달했다. 알약 모양 잔디 운동장을 중심으로 정면에는 이 층짜리 학교 본관이, 좌측에는 체육관과 급식실이, 오른쪽에는 정원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 학교의 모습이었다. 나는 먼저 오른쪽의 정원을 거닐었다. 육 년만에 방문한 만큼 키가 커져서 그런지 뛰어놀기에 충분해 보였던 정원은 몇 발걸음만에 모두 둘러볼 수 있는 크기가 되어 있었다. 나는 운동회 날 그 정원에서 삼 학년 반의 담임선생님이셨던 S 선생님이 진행하셨던 ‘하늘 걷기 놀이’를 떠올렸다. 거울을 눈 밑에 받치고 걸으면 하늘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하셨다. 철없던 나는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라며 투정했지만 그 놀이가 그 날의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니 참 아이러니컬하다.
학교 본관에 들어가기는 역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문을 열고 내부를 슬쩍 둘러보았다. 내가 졸업한 이후 리모델링을 하였는지, 기억하던 모습보다 훨씬 깔끔하고 신식의 모습이었다. 나는 ‘다모임실’, ‘컴퓨터실’, ‘도서실’, ‘과학실’, ‘사학년 일반’, ‘오학년 일반’, ‘육학년 일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4학년의 M 선생님, 5학년의 P 선생님, 6학년의 H 선생님, 그리고 과학 선생님 G 선생님을 떠올려본다. 그토록 기억에서 지워내고 싶었던 학교인데, 더 큰 학교로 나갔다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했었는데, 수업시간 내내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남향의 그 교실의 냄새와 누구보다도 순수했던 친구들의 얼굴을 잊기는 어려운 것이겠다. 본관의 왼쪽에 있는 급식실의 손 씻는 곳, 바닥의 전통놀이용 그림들, 체육관 옆의 자전거 보관함 등을 둘러보며 내 기억 속의 그대로임을 확인한 후, 노란색 학교 버스가 굳게 서 있는 후문 쪽으로 향했다.
후문 쪽으로 빠져나와 향한 곳은 위천교회였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린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지만, 위천초 재학 당시 학교 마친 후 친구들, 후배들과 주로 놀았던 곳이 그 교회였다. 사 학년 말에 이사온 후 처음 동급생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했던 장소가 교회 마당의 ‘방방이'(트램펄린) 이었고, 가장 친했던 삼인방과 ‘회사 놀이’를 하였던 곳, 주말에 온 동네 아이들과 모여 숨바꼭질을 하던 곳이 교회 별관의 ‘큰바위 작은도서관’ 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을 항상 반갑게 맞아주셨던 목사님이 생각났다. 나는 혹시라도 목사님을 뵐 수 있을까 하고 문을 두드렸다. 교회 일을 도우시는 분이 나오셔서 목사님을 불러 주셨고, 나는 ‘목양실’에 들어가서 목사님을 뵙고 비타오백 한 병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목사님은 오륙 년 전에 마지막으로 그곳에 들렀던 나를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최근 통 안 보여서 이사를 간 줄 알았다고 하시기도 했다. 신기하고 고마웠다. 목사님의 고향이 신림동이라는 이야기부터, 나처럼 덕유중학교, 경남과학고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 진학하신 S 선배에 관한 이야기, 나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 S, K, L 등에 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이것이었다. “고향은 네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도 반갑게 맞아 줄 것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비록 실패해도 괜찮으니, 어떤 도전이든 해 보거라”
…나는 며칠 전에 작성했던 <나를 잡아먹는 고향> 이라는 글에 반기를 들고픈 마음이 들었다. 서덕들과 같이 넓은 마음으로 나를 품어줄 가족과 이웃들이 있는 이 마을을… 나의 고향으로 삼아도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사유는 이후 방문한 ‘별들의 고향’ 음악다방에서 더욱 구체화한다.
목사님께 “갑자기 찾아왔는데 좋은 말씀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린 후 교회를 나와 바로 집으로 돌아갈까도 했지만, 역시 위천 면소재지에 나오면 안 들릴 수 없는 별들의 고향 음악다방에 들리기로 했다. 나는 이제 삼년 전인 중학 삼학년 시절 A와 함께 들렀을 적에 사장님께서 틀어주셔서 처음으로 들었던 신 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을 듣고 싶었다. 사장님께서는 신 중현의 히트곡 모음집에 있던 그 신청곡을 시작으로, 다음으로 부탁드린 한 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물좀 주소>, <하룻밤>을, 산울림의 <아니 벌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틀어 주셨다.
나는 그동안 1968년부터 1980년대까지 책장에 꽂혀 있는 <창작과 비평> 영인본에 관심을 가졌다. 아무 거나 걸려라 하고 골라 펼쳐든 1978년 가을호에서는 分斷現實과 民族敎育(분단현실과 민족교육) 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해내었다. 돌이켜보면 기막힌 우연이었다. 당대의 교육계, 문학계의 전문가들이 모여 교육 정책과 교육 문화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좌담 형태로 논의하는 글이었다.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오십여 년 전에 쓰여진 글에서 꼬집은 문제점들이 높은 층위에서 현재에도 유효하기 때문이었다. n수생 증가, 대학 서열화, 입시 중심의 교육, 수도권과 지방의 교육 격차, 강박적 사교육의 범람과 같은 표면적인 문제점은 차치하더라도, 그 근본에 자리하고 있는 사고관이 어느정도 남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식민지시대에서부터 뿌리박혀 버린 ‘식민지의 교육’이 아직도 우리네 교육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일본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국가로서 독립한 지 삼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 교육 제도와 문화는 식민지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하였다.
‘자주적인 교육’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나름대로의 위치에서 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능력과 역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다. 반면 ‘식민지의 교육’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라고 부추기는 교육이다. 낮은 위치의 사람들을 깔보고 높은 위치의 사람들을 동경하는 시야를 심어주는 교육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한 번도 자주적인 교육이었던 적이 있는가? 모든 학생들을 각자의 재능과는 관계없이 표준화된 하나의 시험에 응시하도록 하여 그 점수를 바탕으로 수직선 위에 줄을 세우고 우열을 매겨 대학에 진학시키는 교육이 자주적인 인간을 기를 수 있는가? 자신과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그 틀에 자기 자신을 욱여넣어 높은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같은 시험을 반복하는 이들이 십수만 명에 달하는 사회가 자주적인 인간을 기를 수 있는가? 고수익의 안정적인 직종이 아니라면 ‘굶어죽는다’와 같은 극단적인 언사로 그들이 원하는 앞길을 가로막는 말을 던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자주적인 인간을 기를 수 있는가?
물론 칠십년대에 비해 지금의 교육 현장은 참 많이 개선되었다. 교실에 만연하던 폭력과 체벌은 사라지고, 가난한 자에게 설움을 안겨주던 촌지 문화도 깔끔히 사라졌다. 단순한 수능 점수만으로가 아닌 고등학교 내신과 생활 내역으로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학생부 종합전형이 활성화되어 자신의 장점을 갈고닦아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게 되었으며, 무조건 ‘의대에 가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맞추어 진학하기를 조언하는 어른들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오히려 나 자신은 현대에 들어 개선된 교육 정책의 혜택을 받은 자에 속한다. 별다른 사교육을 받지 않고도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해, 나의 강점인 탐구 역량과 생명과학 분야의 학습 역량을 살려,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서울 대학교에 진학하였으니까.
그러나 스스로의 모습에서도, 주변인의 모습에서도, 가끔은 ‘식민지의 교육’의 잔재적 모습이 눈에 보여 슬플 때가 더러 있었다. 내신 성적으로 다른 친구들을 줄세우며 자신보다 낮은 이들을 열등하게 여기고 높은 이들에게 감언이설을 하는 급우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생활기록부 탐구 보고서 주제 선정과 작성을 ChatGPT에게 맡겨 버리고, 하지 않은 일을 부풀려 작성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급우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경제적으로 더욱 여유로운 이들에게 기준을 맞추어 생각하며 그렇게 해주지 않았던 부모를 원망하고, ‘더 넓은 세계로의 도전’이 아닌 ‘현재 세계에서의 탈출’을 목적으로 입시를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이러한 주변인들과 나의 과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체계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바깥의 모습을 보기 어려우니까. 체계 밖으로 한 발짝 빠져나온 후에서야 그 체계를 돌아보고 자신의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니까. 나는 그저 당장 일 주일 후면 마주할 대학이라는 세계에서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살아갈 마음가짐을 갖추고 싶을 뿐이다.
내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뿌리를 긍정해야겠다. 누구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아오신, 그리하였기에 실수도 많이 하셨던, 나의 부모님을 긍정해야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래된 책과 통기타 음악과 멋진 산과 넓은 들과 찬란한 별들이 있는 나의 동네 위천을 긍정해야겠다. 비록 배척받긴 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위천초등학교와 덕유중학교를 긍정해야겠다. 두 번의 침체기를 겪으며 피부가 많이 상하긴 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배우기 힘든 체계적인 수학, 과학 지식을 체득하게 해 주시고 더 넓은 기회로의 문을 열어주신 선생님들이 계시는 경남과학고등학교를 긍정해야겠다. 지금은 비록 성장통을 겪고 있지만 그 뿌리에는 정겨운 흙냄새 물씬 나는 뽑히지 않는 잡초같은 민중의 단단한 연대가 자리잡고 있기에 결국엔 이 위기도 극복해 나갈 우리나라를 긍정해야겠다.
그리고, 그 누구와도 달라서,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웠지만, 그렇기에 더욱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던, 나 자신의 삶을 긍정해야겠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음악다방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항해박명에서 천문박명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서덕들 논길 위를 걸었다.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는 검푸른 하늘에는 오리온자리와 플레이아데스 성단과 카시오페이아 자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서천에서 빛나는 아마 최대이각 즈음의 금성은 삼 킬로 밖의 상천리의 웬만한 가로등 불빛보다 밝게 빛났다.
시골에서는 웬만하면 3, 4등급의 별까지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은 1등급보다 밝은 별만 보인다. 일등성만 보이는 사회, 나는 내일 그 서울로 떠난다. 그러나 일등성만 보이는 사회에도 이, 삼, 사 오, 육등급의 별들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항상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또 감사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별들의 자손이니까. 그 모든 별들이 그 위치에 존재하였기에 우리가 살아숨쉴 수 있는 것이니까.
나는 몇 등성의 별이 될 지는 모르겠다. 잘하면 일등성이 될 수도 있고, 이등성, 삼등성, 어쩌면 대구경 망원경으로 보아야 겨우 보이는 십등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상의 관측자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내가 본 나 자신은 그 어느 별보다도 항상 밝은 별이리라.
주위의 별들이 너무 밝다고 조급해하거나, 아직은 어두운 별들을 보고 우쭐할 필요는 없다. 단순간에 연료를 다 태우고 초신성 폭발으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초거성이나, 서서히 연료를 태우다가 붉은 빛으로 완숙한 거성이 된 후, 백색 왜성과 아름다운 행성상 성운을 남기는 주계열성 모두,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일 테니까. 모두 아름다운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 중 하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