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 : 우리는 모두 변신하고 있다

2025-04-21 Off By rainrose2718

이 글은 2025년 1학기 서울대학교 교양 강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 서평 과제의 일환으로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우리는 과연 그레고르를 곁에 두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그레고르를 필사적으로 외면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갑충으로 변신한 그레고르의 특성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혐오스러운 외양, 무능력한 신체, 소통의 불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특성들은 그레고르와 가족들의 행동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혐오스러운 외양은 먼저 가족들의 본능적인 공포와 혐오감을 자극한다. 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레고르에게 상처가 되는 것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가족들은 그를 마주한 순간 고개를 돌리고 뒷걸음질치며 도망친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모습이 가족들을 불쾌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위하는 마음에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기를 원한다. 더불어 가족들은 그가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외부인들에게 노출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여동생이 불러들인 의사와 열쇠공을 다시 돌려보내고(p. 56),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들인 하숙인들이 식사하는 시간이면 거실과 연결되는 문을 잠궈 버린다(p. 86). 그를 발견한 하숙인들이 잠자 씨에게 당장 퇴거하겠다고 언성을 높이는 장면은 그러한 가족의 노력이 슬프지만 합리적인 것이었음을 확증한다. 이처럼 그레고르의 ‘존재’ 자체가 악순환을 불러일으키는 순환고리의 시작이 되어, 그를 끝없는 자기혐오로 빠져들도록 한다.

무능력한 신체는 그레고르에 대한 의무적인 돌봄의 필요성을 야기한다. 그레고르는 이전과 같이 일터에 나가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를 하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생활조차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레고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가족의 돌봄에 의지해야 하며, 이는 가족에게 의무감과 부담감, 그레고르에게는 미안함과 부채감을 안겨준다. 처음에 세심하게 신경써 음식을 제공하던 여동생도(p. 55), 판매원으로 일하기 시작하자 의무감 하에서 귀찮아하며 아무 음식이나 넣어 주었다(p. 82). 결국 모든 가족이 생업을 가지자, 그레고르에 대한 돌봄의 의무는 가족에게서 그레고르에게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강인한 과부 파출부에게로 넘겨졌고, 그는 더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극심한 고립감을 느꼈다(p. 85)

소통의 불능성으로 인한 문제는 그레고르 방의 가구를 치우는 문제(pp. 66-71)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동생은 그레고르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넓혀주기 위해 책상과 옷장을 치우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레고르가 다시 사람이 되었을 때 가구가 그대로 남아 있는 편이, 갑충으로 변신했던 시절을 잊기 쉬울 거라며(p. 68) 가구를 치우지 말자고 주장하며 논쟁을 벌인다. 이들은 모두 그레고르에게 좋을 것이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며 갈등하지만, 정작 그는 철저히 소외되어 그의 의견은 아무것도 개입되지 못한다. 그는 여동생에 대한 고마움도, 가구 배치에 대한 의견도, 가족의 운명에 대한 의견도, 그 무엇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주변의 판단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하며 외로움과 답답함을 느끼며, 자신을 둘러싸고 심화되는 가족들의 갈등으로 인해 더욱 큰 미안함과 부채감을 느낀다.

그레고르는 이 세 가지 특성이 모두 중첩되었기 때문에 그 비극성이 극도로 심화된다. 한 가지 특성이라도 제외된 경우들을 살펴보자. 만약 그레고르가 혐오스러운 갑충이 아니라 귀여운 고양이로 변신했다면, 그들은 마치 우리가 반려동물을 기르듯 먹이를 주고 쓰다듬으며 사랑을 줄 것이고, 오히려 ‘돈을 벌어오는 기계’와 같았던 이전의 생활에서보다 가족과 더욱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레고르가 혐오스럽고 말도 할 수 없지만 강한 신체적 능력을 가진 생물, 가령 유인원으로 변신했다면 서커스단이나 막노동 등에 취직하는 식으로 가족들에게 돈을 벌어다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레고르가 소통이라도 가능했다면,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고 그의 운명을 가족들과 함께 슬퍼하며 생의 마지막을 동정과 사랑 속에서 마감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갑충이 된 그레고르는 귀엽지도, 힘이 세지도, 말을 할 수도 없었기에 그토록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는 그레고르가 단순한 소설 속의 비극적인 등장인물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의 가족도 언제든지 그레고르처럼 ‘변신’할 수 있고, 우리도 언젠가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들은 늙어가며 젊었을 때와는 다르게 겉모습이 변해간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숱이 듬성듬성해지며, 허리는 굽고 몸은 비쩍 말라간다. 일할 수 있는 능력도 떨어진다. 정년 퇴임 이후 자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언젠가는 그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진다. 치매나 알츠하이머같은 신경 계통 질병을 얻으면, 가족과 정상적인 소통마저 불가능해진다. 우리의 조부모님, 부모님은 서서히 ‘변신’하고 있고, 우리도 언젠가는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늙은 부모를 요양원에 보냈기 때문에, 매체에서 본 교통 사고를 당해서 식물 인간이 된 환자를 둔 가족은 지지리도 운이 없는 케이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앞의 성취를 얻고 돈을 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서서히 ‘변신’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는 그 사실을 잊기 위해,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우리 곁에 있는 그레고르를 필사적으로 외면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못생겼다며 왕따당하던 아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포기하던 학창 시절, 지하철역의 노숙자를 보고 ‘나는 저렇게 안 되어서 다행이다’라고 내심 안도하던 청년 시절,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요양원에 보내고 명절마다 찾아가던 장년 시절… 결국 우리가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는 이미 후회하기에도 너무 늦었을 때이리라.

읽은 판본 : 프란츠 카프카, <변신 · 선고 외>, 김태환, 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