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안간 고향 방문

2025-03-23 Off By rainrose2718

금요일 저녁 경남과학고 동창회에 다녀온 후 밤늦게 잠에 들었더니, 일어났을 때 몸이 어딘가 불편하고 찌뿌둥했다. 한시경 룸메이트와 짜장면을 시켜먹고 피로에 못 이겨 다시 잠을 잤더니 다섯시였다. 과제를 위해 주말 약속까지 비워 두었는데 하루의 절반을 무의미하게 날려보낸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하고싶어서 문학과 철학의 대화 과제로 주어진 책인 <젊은 베르터의 고뇌>와 간단한 필기구를 챙겨들고 919동 독서실로 갔다.

머리가 계속 아팠다. 감기는 아니지만 두통 같은 것이 있었다. 집중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생겨나는 두통이다. 나는 이전부터 간직해온 로망을 실현하고 싶었다. 지하철 이 호선을 타고 한 바퀴를 돌며 책을 읽는 것이다. 나는 책과 필기구를 그대로 들고 관악02번 버스를 타고 낙성대역으로 나가 지하철 이 호선에 몸을 실었다. 외선순환을 탈까 내선순환을 탈까 고민하다 결국 익숙한 내선순환을 타고 말았다.

나는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책과 샤프를 들고 까닥까닥 서 있다가, 문래역 즈음에서 운좋게 난 자리를 차지해 앉았다. 책 속의 베르터는 귀족 사회의 허례허식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국회가 보이는 당산철교를 건너 합정역 즈음에 다다르자 ‘다음 역은 홍대입구역’이라는 방송이 송출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향에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카이스트 캠프 ‘창글리’에 다녀온 후 9년지기 친구를 만나기 위해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인천 장기동을 잠깐이나마 방문해보고 싶었다. 나는 그 로망의 실현을 포기하고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공항철도로 환승했다.

긴 환승 통로에는 무빙워크가 있었고 벽면에는 환하게 빛나는 전광판들이 있었다. 전광판에는 아이돌 멤버나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따위의 생일 축하 광고가 있었다. 나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물론 아이돌 팬덤 문화나 오타쿠 문화 따위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그런 류의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하루에도 수만 명이 지나다니는 지하철 벽면의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생일 축하 광고는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먼저 광고비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아마 적어도 몇천만 원에서 몇억은 할 지 싶었다. 그리고 게시자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소속사에서 새삼스럽게 그런 광고를 걸 리는 없고, 역시 팬클럽이 벌인 일 같았다. 신기했다. 대면한 적도 없는 사람, 또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캐릭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제 돈을 써서 광고를 건다는 것이 말이다. 나는 그 순진무구한 사랑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는 한편 어쩌면 그것이 극도로 파편화된 현대인의 종교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홍대입구역에서 계양역으로 가는 공항철도는 자리가 잘 나지 않았다. 나는 혼잡한 환승역인 김포공항역에서 겨우 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습게도 계양역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내렸기에, 두 개밖에 없는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이 가득 차 버렸다. 그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해맑게 웃으며 하차하는 어린아이 둘을 보았다. 분명 나도 십 년 전에는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누군가의 시선에 비추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미 부모님과는 삼백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곳에 체재하는 대학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고등학교 삼학년에 재학중인 고향 친구를 만났다. 계양역 앞에서 장기동 택지지구로 향하는 수많은 버스들 중 하나를 잡아타 아라뱃길을 건너며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달려나가는 수많은 차들의 반짝거리는 행렬, 불빛을 바라보고 장기동 정류장에 내렸다. 이차선 좁은 길을 마주보고 건너편에는 최근 연락하는 얼마 되지 않는 고향 친구가 서 있었다. 나는 안녕하신가 하고 인사를 한다. 분명 거의 7~8년 만에 보는 것이었지만 딱히 반갑지는 않았다.

유치원까지 포함해 오년 정도 다녔던 계양초등학교에 들어가보려고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 걸까. 분명 이사오기 전전날 마지막 밤에 친구와 동생과 눈싸움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땐 문이 열려있었다만. 친구에게는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번 년도 일학년 신입생이 이십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돈이 있는 집이면 모두들 주변의 검단 신도시로 떠나버렸다고 했다. 분명 내가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스무명씩 다섯 반은 있는, 오백명 정도 규모의 학교였는데, 한 순간에 쇠락해버린 것이다. 토요일 밤거리는 정말이지 조용했다. 나와 그 친구, 그리고 새로 합류한 친구 하나 빼고는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내가 사실 08년생이었다고 말했다. 다들 신기해했다.

이 호선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장기동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1100번 버스를 잡아타야 했다. 나는 정작 그 동네에 살 때는 그 버스를 도저히 타본 적이 없었다. 골수 철덕에 교통 덕후이지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다녀야 했던 시기에는 합정역 방향으로 나가볼 일이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토록 궁금했던 그 버스를 타보기 위해 계양1동주민센터를 지나쳐 대로변에 있는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가 올 때까지는 십몇 분 정도가 남아 있었고 그동안 고향친구 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친구들과 그들 자신에 대한 근황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뭐 이제는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만나러 갈 수 있으니.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친했던 키가 작았던 여자아이는 스웨덴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 아이의 집에 놀러갔을 적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공공 놀이터 바로 옆에 있던 빌라였는데 거실에는 소파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와 단둘이 앉아 그 아이의 비밀을 들었다. 자신이 사실 08년생이라는 것… 나도 같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절대 밝히지 말라’라는 명령에 따라 그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 아이의 폴더폰으로 ‘마이펫과 놀기’라는 게임을 했다. 컴퓨터로 플래시 게임도 했다. 그러나 겨울무렵 그 아이는 나를 떠나갔다. ‘개미같다는 말은 해도 귀엽다는 말은 하지 마라’라는 말이 아직도 선하게 기억난다. 나는 계속 그 아이에게 귀엽다고 말했다.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 진심을 그대로 말하고 싶었다. 모든 나의 죄의 시작이다. 나는 끝까지 그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지만 3학년 즈음 놀이터에서 누군가 그 아이가 08년생이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나는 인천에서 ‘이상한 아이’였고 구제불능이었다. 눈치가 없었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사는 아이였고 똑똑한 척을 하는 아이였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수학적 지식, 과학적 지식 따위로만 부모를 포함한 어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 그것을 갈구하고 티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배 모양 놀이기구가 있는 이화신동아 놀이터에서 누군가의 어머님께서 나를 두고 ‘이 아이는 관리사무소에 이야기해서 놀이터에 못 오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그 배 모양 놀이기구는 철거되고 평범한 놀이터로 바뀌었다. 이제 수많은 동네 친구들과 ‘지옥 탈출’ 놀이를 했던 그 놀이터는 더이상 없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본 십년 전의 나의 모습은 어떠했느냐고 물었다. 그리 친하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진 못했지만 두 명 모두 하나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항상 해맑게 웃고 있었다는 것. 화를 내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

나는 장제로를 달려오는 1100번 버스에 탔다. 한 시간은 걸리리라 생각했지만 주말의 늦은 밤길인지라 버스는 텅텅 빈 올림픽대로를 사뿐히 달려나가 이십 분 이내에 합정역에 다다랐다. 나는 공허한 마음으로 그 웃음에 대해 생각하며 2호선을 타고 낙성대역으로 향했다.

나의 그 웃음은 비열한 조소였을까, 순수한 행복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에서든 배척당하고 교정의 대상이 되는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가 버텨내기엔 너무나 힘든 현실 세계를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낸 세계로 도피한 자의 해방의 웃음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하철, 하츠네 미쿠, 수학, 컴퓨터로 가득찬 세계를 살아가던 자의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