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종말, 시간의 분화

2025-06-24 Off By rainrose2718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공간의 장벽을 허물어버렸지만 도리어 시간의 단층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공간적 배경보다는 시간적 배경에 따라 ‘세대’라는 집단이 형성되며, 개인은 세대 내에서 공통적인 특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어떤 사람의 특성을 추측할 때 세대보다는 지역에 근거해서 추측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상도 사람은 기가 세다, 충청도 사람은 여유롭다, 전라도 사람은 요리를 잘 한다’라는 말처럼, 지역마다 특색 있는 이미지가 있었고, 여러 지역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대화 주제로 오르내리는 일도 많았다. 이러한 차이는 지역적 고립의 산물이다. 대부분 자신이 태어나서 거주하는 그 지역의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친밀감을 느꼈다. 따라서 사투리로 대표되는 언어적 차이나, 전통 음식이나 놀이 따위로 대표되는 문화적 차이가 지역마다 크게 다르게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 지역의 차이는 점차 사라지고, 시간의 차이가 대두되고 있다. 지역의 특색을 만들어내던 지역적 고립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점차 소멸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프라인에서 같은 지역의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신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과 교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같은 관심사를 지니고 쉽게 공감할 수 있으며,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상대는 대부분 자신과 연령대가 비슷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함과 어색함을 감수하고 전혀 다른 연령대의 사람과 소통하지 않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을 향해, ‘틀딱’, ‘MZ’, ‘맘충’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이해를 시도하기보다는 단절과 분리를 자초한다. 이같은 현상은 지역적 고립을 점차 완화하는 반면, 시간적 고립을 강화한다.

이제는 고향을 그리워하기보다는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고향의 모습은 재개발 사업, 신도시 건축, 젠트리피케이션 등으로 인해 상전벽해로 달라진다. 고향에서 교류하던 사람들도 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버렸기에, 돌아갈 수 있는 공간적인 고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회상하는 고향의 모습, 고향 사람들의 얼굴은 오직 과거의 그 시점에만 존재한다.

세대에 따른 언어와 문화의 차이도 크게 벌어진다. 서울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억양에는 서울 사투리가 아직도 묻어나는 경우가 많다. 젊은이의 언어에는, 인터넷에서 급격하게 발달한 ‘밈’이라던지 ‘은어'(최근 친구의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何が好き?무엇이 좋아?’ 라는 일본어를 대화에 섞어 쓰는 모습을 관찰했다.) 가 많이 섞여 있어, 이를 모르는 사람은 그들의 대화를 온전히 해석하지 못한다.

이러한 생각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지하철 이 호선에서의 풍경이었다. 지하철에 올라 손잡이를 잡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면, 머지않아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으로 숏츠나 릴스 영상을 감상하는 승객들의 모습에 초점이 맞는다. 어렴풋이 보이는 영상의 내용은, 그들의 나잇대에 따라 많은 차이를 나타내는 듯 하였다. 젊은이들은 귀여운 강아지, 고양이 영상이나, 어쩌면 미래에 자신이 그것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상기시켜주는 해외여행, 자동차 또는 취미 등의 영상을 자주 보는 듯 하였다. 그 색채는 대부분 파스텔톤이고 몽글몽글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중장년 이상은 요리하는 방법, 정치 관련 영상 등 진한 원색의 투박한 영상을 자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그러한 ‘알고리즘’에서도 시간의 단층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물론 무조건 ‘지역으로 구분되던 과거가 좋다, 과거로 되돌아가자’ 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예전에도 극단적인 지역감정과 같은 분명한 단점들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도 이렇게 세대로 집단이 구분되는 현실이 더욱 익숙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이방인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역으로 구분되던 시기에는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의 문화와 언어, 음식 따위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그런 지역적인 이방인이 다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시간적인 이방인들도 존재한다. 나도 ‘음악 취향’ 쪽에서는 그런 편에 속했는데, 60~70년대의 음악을 좋아하는(최근에는 19세기 음악을 즐겨듣고 있긴 하다) 나는 중, 고등학교 시기에는 ‘왜 그렇게 옛날 노래만 듣냐’ 라며 신기한 사람 취급받은 적이 많았고, 노래방에서 다수가 아는 노래를 부르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던 적도 있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과거에 접근하기 쉬워진 이 시대에는 도리어 시대적인 이방인이 많아질 듯 하다. 결국, 이처럼 ‘우리들과 다른’ 이방인을 포용하고자 하는 태도가, 정치권에서 그토록 외쳐대는 ‘사회 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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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2024,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 손성화, 어크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