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방식으로서의 철학

2025-07-05 Off By rainrose2718

우리가 흔히 ‘철학’이라 부르는 학문 또는 행위에는 크게 두 가지의 갈래가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지식’으로서의 철학과 ‘방식’으로서의 철학이다.

지식으로서의 철학 (지식-철학)
– 인류가 쌓아온 철학의 체계 및 그것을 구축해 온 철학자들의 논증과 사유 경로에 대한 지식 자체를 말한다. 철학자가 직접 말하거나 작성한 책, 철학의 역사에 관한 책, 어떤 철학자에 대해 다른 학자가 평론한 책 등을 읽거나, 철학 강의를 듣는 것 등을 통해 습득할 수 있다.
– 일반적으로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멈추어 있는 것이 물체의 본성이다”라고 말했다’ 라는 명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뉴턴에 의해 반증된 명제이지만, 그가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따라서 ‘철학자 A가 실제로 그런 주장을 펼쳤는가?’와 같이, 철학자의 주장의 참뜻을 해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 이미 존재하는 지식 체계를 습득하는 것이므로 수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고 이야기하는 경우보다는, ‘내가 이해한 것이 올바른지’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

방식으로서의 철학 (방식-철학)
– 삶을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사유의 과정을 거쳐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자신의 삶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고 고통을 겪을 때 이러한 삶의 방식, 즉 ‘철학적 삶’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으며, 문학 작품에서 읽은 다른 인물의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이러한 방식에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가볍게는 자연이나 사회 현상 등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서 질문을 던지며 출발하기도 한다.
–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을 가진다. 개인의 경험과 동시대의 사회상에 근거하여 논증과 사유를 이어나가며, 엄밀하게 정의된 학문적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유 과정과 말의 참뜻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와의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 결론은 언제든지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의해 반박될 수 있기에 위태로우며, 지속적인 수정을 거쳐 보완된다.
–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는 과정이므로 능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향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질문을 던져 능동적 사유를 이어나가도록 자극하기도 한다.

지식-철학과 방식-철학이 완벽히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자는 객관적이고 참과 거짓을 명확히 판별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주관적이고 참과 거짓을 명확히 판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의 양 극단에는, 지식-철학만을 공부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루기만을 추구하거나(“나는 쇼펜하우어를 연구해”, “나는 니체를 연구해”), 방식-철학만을 행하여 무에서부터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올리기를 추구하는 경우(“나의 철학은 너무나 위대하여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가 있다.
그러나 나는 두 경우 모두를 그리 좋게 바라보지 않는다. 전자는 자아가 결여되어 있어 공허하고, 후자는 타인과 나눌 수 없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지식-철학, 방식-철학이 모두 필요하다.

철학의 두 갈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다.
먼저, 지식-철학은 방식-철학이 개인의 세계에서 공론의 영역으로 확장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식-철학은 추상적인 사유의 흐름을 하나의 개념어나 인용구로 축약할 수 있게 한다. (이 글에서 사용한 ‘의미’ 같은 표현들도 선대 철학자들의 수많은 사유가 현재의 의미를 지니게끔 하였다.) 그 의미와 표현의 대응은 보편적으로 참이라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해를 최소화하며 더욱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철학적 논의를 유의미하게(상호 이해에 근접하게) 이어나갈 수 있다. 또한, 지식-철학은 과거 철학자들의 질문과 주장, 논증 자체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끔 하여, 방식-철학적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즉, 지식-철학은 방식-철학이라는 기계의 작동에 필수적인 윤활유이자 휘발유이다.
둘째로, 방식-철학은 지식-철학의 체계를 형성하는 원천이 된다. 두말할 필요 없이, 지식-철학의 지식들과 체계는 역사에 기록된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던져왔던 질문과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노력, 즉 방식-철학에 의해 쌓아올려진 것이다. 이 과정의 일면은 곧 애매하고 모호한 자연 언어의 단어들을 이리저리 조합하고 재정의하여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며, 이는 곧 수많은 물질이 섞여있는 원유를 유용한 순물질로 분류하는 정유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즉, 방식-철학은 언어의 바다에서 시추한 원유로부터 지식-철학이라는 윤활유와 휘발유를 분리해 내는 정유 기계이다.

그 관계를 대략적으로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철학 전반에 대한 조망(개인이 아님!)

물론 이 Analogy(유비)에는 반박할 만한 부분(대표적으로, 실제 휘발유는 연소되어 사라지지만, 지식-철학은 방식-철학을 촉발한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는다)이 많이 있을 것이지만, 철학의 두 갈래가 서로에게 필수적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최선의 비유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철학적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지식-철학을 학습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나의 주장은 이것이다. 가볍게는 일상적인 호기심에 의한 궁금증부터 무겁게는 삶의 고통과 부조리에 이르기까지, 삶에서 떠오르는 의문을 부여잡고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철학적 삶의 방식, 즉 방식-철학을 체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하여 타인들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도록 지식-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글과 말로써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고 타인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혼자만의 방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쓰는가?
내가 지식-철학을 공부하도록 할 이유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때껏 내 자신의 서사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삶에서 겪은 고통과 부조리들을 해석하기 위한 사유를 해 왔고, 글을 써 왔다. 그러나 이들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논의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내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인용이나 참고 문헌 등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형식과 체계를 갖춘 학문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시로 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상식 수준의 명제를 제외하면) 어떠한 철학자의 인용도 존재하지 않는 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나는 아직 지식-철학의 소양이 부족한 편이다. 따라서 더욱 설득력을 갖춘,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위해서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선대 철학자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철학사 서적을 읽으며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철학사를 개관하고, 이후 나의 철학적 질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철학자들에 대해 깊이 공부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