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9. 06
대치동에서 오후 6시에 B, Y와 식사 약속이 잡혔다. 나는 기상 이후 무언가를 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해낸 것은 <분노의 포도> 몇 페이지 읽기와 우디 거스리의 <Tom Joad Pt. 1, 2>를 듣고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찾아본 것 뿐이었다.
다섯 시 즈음 대치동을 향해 다시 출발했고, 관악02를 타러 갈 때 세찬 비가 내렸다. 하수구가 역류하여 오늘 정말 무슨 일이 날 줄로만 알았다. 버스를 타고 낙성대역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다행히 비가 거의 멎어 있었고, 나는 전철 의자에서 <광장>을 읽으며 선릉역을 거쳐 한티역으로 가서 Y를 기다렸다. 이내 오른편에서 걸어온 Y를 만나고 곧이어 출구로 나온 B도 만났다. 셋이서 만난 것이 참 오랜만이라 근황 이야기를 좀 하다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사회, 교육, 빈부격차 등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했던 것 같다. 이후 대치동 거리를 좀 걸어 ‘진성수학학원’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이야기를 좀 더 하고, 한티역으로 가서 Y와 헤어지고 나와 B는 대치역까지 걸어와 삼 호선을 탔다. 도심부의 어디론가로 떠나기로 작정하고, 사십여 분 간을 줄곧 전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옥수, 금호, 종로3가, … 나는 경복궁 역까지 나아가 서촌에 있는 ‘Bob Dylan & The Band’라는 LP 바에 닿을 수 있었고, B는 을지로3가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 제 집으로 돌아갔다.
가장 저렴한 Hoegarten 맥주를 한 병 사서 Hard Rain을 비롯한 Dylan의 노래를 한껏 신청하고—강냉이를 쫙쫙 씹으며 최인훈을 마저 읽었다.
열두시 경 마감을 하는 관계로, N버스를 탈 작정으로 바를 빠져나와 광화문을 향해 걸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며 궁궐 담벼락을 더욱 짙은 잿빛으로 적시고 있었고, 나는 우산 하나를 펼쳐들고 광화문 앞을 걸었다. 러닝복을 입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과, 우산을 쓰고 전화를 받으며 걸어가는 회사원 등을 스쳐 보았고, 마침내 어느 천막 아래서 겨우 비를 피하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 세 명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아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것인 줄로만 알고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다가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 “Where do you go to?” 그러나 할머니, 어머니, 손자로 구성된 그 가족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 같지 않았다. 발음상의 이유에서 스페인어로 추정되는 언어를 사용하였고, 어린 남자아이만이 영어를 알아듣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통역 덕분에 나는 그들이 Uber Taxi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한국에 2주간 머무르고, 이탈리아의 Sardinia 섬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집에 와서 찾아보니, 그 섬에서는 고대 라틴어의 형태가 그나마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이탈리아어의 방언을 사용한다고 했다.
요즘같은 세상에 괜히 오해를 사거나 불안감을 드리지 않기 위해 굳이 연락처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뭏든 신기한 기억과 인연으로 간직해두려고 할 따름이다.
그렇게 비를 뚫고 심야근무를 서시는 경찰관 분들께 목례를 건네며 종로1가 정류장으로 향해갔다. 곧 오는 N15버스에 부둥부둥 낑겨 한 시간 반 즈음을 달려 낙성대 정류장에 도착했고 걸어서 기숙사에 돌아가니 세 시 즈음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