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외우기와 생물학 시험공부의 공통점
고교시절, 생물학은 분명 내가 가장 자신있어 하고 잘 한다고 생각했던 과목이었다. 그러나, 시험을 위해 생물학을 공부할 때마다, 항상 ‘이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문제를 많이 풀 수록 절대적인 실력이 늘어난다고 생각했던 수학과 달리, 생물학은 특정한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고, 세부적인 물질 이름과 기관 명칭 등을 완벽히 기억해야 했다. 따라서, 그 시험이 끝나면 다른 곳에 써먹을 일이 없을 것 같아,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어제 새벽, 기숙사에서 룸메가 외박을 나간 틈을 타 <The Entertainer>의 기타 악보를 외우면서 다시금 느껴 보았다. 그 악보를 한 음표, 한 박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는 것은, 다른 곡을 연주하거나 다른 곡의 악보를 외우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즉각, 위의 ‘생물학 공부의 무의미성’과 함께 한번에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아무리 세부적인 것에 대한 공부 혹은 연습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더욱 보편적인 규칙이나 법칙 등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고 체득하여, 같은 범주(학문, 악기 등)에 속한 다른 세부적인 것을 대할 때 더욱 쉽고 빠르게 대할 수 있게 되므로, 세부적인 것을 공부하고 연습하는 것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세포생물학’ 파트에서 공부했던 세포막의 특징과, ‘분자생물학’ 파트에서 공부했던 효소의 작동 원리, ‘유전학’ 파트에서 공부했던 유전자 발현 조절 기작 등을 바탕으로 ‘생리학’ 파트에서 다루어지는 ‘표적세포가 호르몬에 대해 반응하는 방법’을 더욱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생물학을 처음 공부한 지 3년이 거의 되어가는 지금은, 처음 보는 어려운 내용일지라도 배웠던 여러 개념들과 연결지으며 얼마간의 노력을 더하면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백지 필기’ 공부법을 사용해 공들여 외웠던 용어들과 그 연결망이, 쌓이고 쌓여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음악(기타)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Tab 악보를 보고 한 음을 찾아서 치는 데만 해도 수 초가 소요되었지만, ‘E계열 코드’, ‘A계열 코드’ 등의 코드 규칙을 이해하고, 스케일을 습득해 가는 과정에 있는 지금은, 난이도가 쉬운 악보는 초견에도 꽤 그럴듯하게 연주할 수 있으며, 조금의 연습을 거친 후에는 더욱 빠르고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악보를 연습하며 무의식적으로 습득한 손의 이동에 관한 규칙들과, 의식적으로 습득한 ‘스킬’들과 연주 방법들이 결국 실력의 향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비단 생물학과 음악 뿐만이 아니라, 수학 공부, 외국어 공부, 물리학 공부, 철학 공부, 언어학 공부, 수채화 그리기 등에도 적용되는 원리일 것이다.
…어쩌면 ‘언어’의 본질적 특성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문법서를 읽고 모국어를 학습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형제자매, 주변 친구들의 구체적인 발화 사례들을 접하고, 문법 규칙과 단어의 의미들을 무의식적으로 추론해내 체득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제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기하학의 왕도’ 따위를 탐하려 하지 말자. 수많은 예시들과 자료들에 직접 힘들게 부딪히는 일을 반복하여, 자연스레 체득되어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이니까.
Good
Tha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