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일렁일렁

2025-11-15 3 By rainrose2718

갈수록 사람들이 글에 대해서 느끼는 무게가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것을 나 자신에게서 먼저 느낀다.

스마트폰을 압수당한 채 한적한 논밭 한가운데서 꼬박 이 주를 보내던 고등학생 시기, 자극은 적었지만 나의 정신은 의미로 충만했다. 매일 읽고, 공부하고, 생각하며 느끼는 감동과 고통, 떨림이 당면한 삶으로서, 현실로서 다가왔다. O 선배의 글은 한 자 한 자가 나의 마음을 울리고 감탄을 자아내며, 삶의 태도에 준거로서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 선배처럼 서울대학교에 진학하여—매일 밤 공부를 하고, 철학적 사유를 하고, 블로그에 글을 쓰며, 누군가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만한 환경적 조건이 갖추어진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서울대학교의 학적도, 만년필도, 글을 투고할 개인 블로그도 갖추어져 있는 나는 지금, 매일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매일 아침 늦게 일어나 씻지도 않고 지각으로 강의실에 도착하여 꾸벅꾸벅 졸다가, 동아리 방에 가서 잡담을 몇 시간 늘어놓고, 밤늦게 기숙사에 돌아와 공부를 하기는커녕 휴대폰만 하루 온종일 만지작거리다가 늦게 잠들어버리는, 그런 생활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글쓰기와 공부하기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철학 서적 읽기는? 문학 읽기, 창작하기, 기타 연습하기는? 나는 왜 하루 온종일 나의 인생을 갉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던 것일까?

실존적인 고통을 자극으로, 새로운 자극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인 세상이다. 서울엔 수많은 지인들과 친구들과 잠재적 친구들이 있다.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져서 외롭거든,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을 불러내어 외로움을 달래면 그만이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과제를 미루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하는 걱정과 불안은, 블로그 새로고침과 SNS 접속으로 잊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노트북 안의 세계로 빠져들어 새벽 두시 반까지 허우적대다가 졸음이 밀려오거든 노트북을 들고 바로 옆의 침대에 누워 짧은 잠을, 안일한 잠을, 청하면 그만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글을, 수십 시간을 들여 자신의 치부까지 처절하게 드러낸 그런 글을 읽어도, 감흥이 오지 않는다. 평시에 읽는 수십 수백 편의 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스티브잡스의 1984년 매킨토시 발표와 연관지으며 감동을 받고 그리도 열렬히 좋아하던 밥 딜런의 음악이나, 슈베르트의 가곡집 <Die Schöne Müllerin> 따위를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최인훈의 소설을 읽어도,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도, 소수 언어의 소멸에 대한 보고서가 담긴 책을 읽어도, …

나는 자극의 범람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방향타 없는 나의 연약한 기반 뗏목 위에 위태로이 발을 디딘 채 선인들의 수많은 마스터피스 바다 위에서 일렁일렁. 일렁일렁. 일렁일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