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증
감기에 걸렸다. 어제 학원 알바를 너무 열심히 하고, 기숙사에 들어와서는 또, 늦게 잠에 든 탓일까. 감기약을 먹었다. 잠이 온다. 머리가 아프다. 언어와 컴퓨터 과제를 한답시고,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한답시고, 노트북에 눈을 갖다 붙이고 흰 화면의 검은 꼬부랑 글씨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니—정신이 멍하다 머리가 아프다 잠이 온다 만사가 귀찮다.
그런가 하면 고등학생 때 심심찮게 겪었던 증세, ‘이인증’을 회상한다. 취침의 자유가 없던 시기, 하루 여섯 시간 이상 자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시기, 피로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생기곤 했더랬지. 마음가는 대로 수면의 장단을 조절할 수 있게 된 대학 진학 이후에는 아마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것 같지만, 어쩐지 오늘 그것이 재발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와의 유리, 의식의 부유. 나의 의식은 공허 속으로 흩어지고 단지, 피로나 열감으로 인해 생기는 두통의 말단만을 감각하며, 자동으로 움직이는 몸의 꼴을 언어의 발화를 관찰한다. 친구 A가 앞에서 걸어온다 인사를 잘 할 수 있을까 “안녕” 잘 해냈군 다행이야 수업 필기를 잘 할 수 있을까 멍———’아데노신삼인산 즉 ATP는 생물의 에너지 화폐로서 주로 미토콘드리아에서 세포호흡 과정을 거쳐 생산되며’——— 수업이 끝났군 다행이야 쉬는 시간에는 무얼 할까 옆 친구가 말을 걸어 오는군 ———’하하 호호 그랬구나’———다행이야.
군중 속에서 경험과 의식과 육체 사이가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 사이의 거리 즈음으로 늘어났을 무렵, 노곤한 의식이 피로한 육체의 발끝만을 건드려볼 무렵 — 합강 시간이 다가온다. 수학의 정석을 푼다. 잘 풀리지 않는다. 생물 필기 정리를 건드려본다. 쉽지 않다. 마침내 일기장을 펼쳐 들고 제트스트림 0.5mm 볼펜을 부여쥐고 얼마 남지 않은 의식의 희미한 잠상을 현상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빠져든다. 글은 자동으로 써지고—손은 자동으로 움직이고—필기구를 빌려달라는 옆자리 친구의 속삭임은 들리지 않고…
그렇게 열두시 정각 자정이 되어 삼차시가 끝나는 종소리가 들리면 기숙사로 터덜터덜 걸어가겠지. 언제나보다 뚜렷한 정신으로. 그리고 필경 역사와 화학을 사랑하는 룸메이트와 이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하며 새벽 서너시까지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