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작아지는 느낌

2025-11-30 0 By rainrose2718

2학기를 마무리지으며 쓰는 최초의 소회

임의의 양수 \(\)\(\epsilon\) 에 대하여, \(|x – p| < \delta \rightarrow |f(x)| < \epsilon\) 이 되도록 하는 어떤 양수 \(\delta\) 를 항상 잡을 수 있을 때, \(f(x)\)는 \(x \rightarrow p\) 에서 0으로 수렴한다.

이 명제의 결론 부분은 다시, ‘\(f(x)\)의 절댓값은 \(x\)가 \(p\)로 갈 때 한없이 작아진다’라고 다시 쓸 수 있을 터이다. 나는 이 때의 \(|f(x)\)처럼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주당 9시간의 샌드페블즈 연습부터 17학점의 학업, 주당 7시간 이상의 학원 아르바이트, 그리고 기타(others) 모임들까지. 2학기가 시작할 때 나는 이들을 모두 감당할 수 있으리라 호언장담했다. 1학기 때의 학문적 열정을 가지기만 한다면, 언어학과 전공수업, 대학글쓰기, 대학영어, 수학, 생물학 실험—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도 교양과목으로 점철되었던 1학기 때의 ‘4.19학점’의 신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매주 금요일 대치동에 과고생들을 위한 생물학 자료를 만들러 출근하면서도, 어떠한 무의미나 후회감, 금요일 밤에 약속을 잡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따위는 들지 않고, 학업에도 집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행운의 신은 모두 나에게로 강림하여, 어떠한 질병이나 고난 따위도 생기지 않고 오로지 필요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건강한 체력과 총명한 정신을 선사하리라, 너무도 쉽게 확신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초기의 예상들이 하나, 둘, 깨어져가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선택을 하고, 일을 너무 크게 벌려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분모가 너무 커진 나라는 분수는—이내 너무나도 손쉽게 \(\delta\)를 허용하며, 0으로 수렴하고 있다.

대학 입학 초기에 꾸었던 큰 꿈을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 몇 달 전, KAIST 자기소개서를 쓸 때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르는 꿈을. KAIST에 진학하여 LLM으로 생명의 언어를 연구하고 싶다고 자기소개서에 꾸역꾸역 적어 내었던 그 꿈을, 허울꿈일 뿐을. 그렇게 적어 놓고 나서 12월 12일, 서울대 합격 발표를 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추고 싶다’라고 생각하고는 KAIST를 내팽개친 후에도 몇 달간은 그런 연구를 하고 싶다고 호언장담했던 그 꿈을 생각한다.

진심이었는가?—를 묻기 전에 그 꿈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있었는가?를 묻고 싶다. 언제 한번 그런 비슷한 주제의 최신 학술지에 실린 영어 논문이라도 하나 찾아서 깊이 있게 읽어 보기라도 했는가? 학계의 최근 동향을 찾아 본 적이 있는가? 하다못해 GPT에 질문이라도 해본 적이 있던가? KAIST 입시를 위한, 허울뿐인 꿈, 과고 자소서에 적었던 ‘우주 탐사선 개발자’같은, 허울뿐인 꿈이 아닌가?

사람이 ‘분수’라면—모름지기 사람은 모두 ‘제 분수’를 들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상은 분모요 그 사람의 능력은 분자인 것이다. 나의 분수는 한없이 작아지고 있다. 0으로 수렴하고 있다.

분모는 끝없이 지수적으로 늘어난다.—’인문학적 소양’, ‘언어학자’, ‘세계 여행가’, ‘기타리스트’, ‘소설 작가’, ‘독일 교환학생 로망’, ‘생명과학자’, ‘교양 수학 학습자’, …

그러나 나의 분자는 \(f(x)=k\)꼴의 상수함수, 아니면 \(f(x)=x \log x\) 정도의 함수로 거의 횡보한다.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X 스크롤을 내리며, 블로그 서로이웃들의 글을 새로고침하며, 시간은 횡보한다. 이유없이 서울 도심 한복판을 새벽 내내 배회하며, 시간은 횡보한다. 동아리방에 가서 선배들과 동기들과 잡담을 주고받으며—물론 사회적 능력치는 조금 상승하겠지만—시간은 횡보한다.

이 학기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분자를 키우고 허황된 분모를 차츰 줄여 나갈 때라고 생각했다. 분수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분수를 키워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한없이 작아지면 모든 분야에서 먼지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제는 나의 주력 분야에 집중해야 할 때가 왔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