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횡단자의 향수병 블루스

2025-12-14 1 By rainrose2718

1. 아버지

나의 계급 상승 추구는, 유년기부터 아버지의 영항을 받아 내재된 무의식적인 목적 같은 느낌이 큰 것 같다. 아버지(내겐 할아버지) 없이 가난하게 성장하셨던 아버지는 계급 상승에 대한 열망이 강하셨다. 젊은 시절을 열심히 절약하며(그렇게 유행하던 해외여행도 안 가시고, 유흥도 즐기지 않는 등 근검한 생활을 하셨다.) 보내신 덕분에, 서울에 집을 얻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꽤 안정적인 가족을 이루셨다.1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수학 실력은 뛰어나셨지만 영어 성적이 걸림돌이 되어, 서울권 대학이 아닌 지방대에 진학하셨고, 그 탓에 회사에서 중요 요직까지 승진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시며, 이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크신 편이었다.

2. 유년기

  나는 어릴적부터 상술한 것과 같은 아버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2를 들어왔고, ‘질 좋은 사람들’로 표상되는 상위 계급의 행동 양식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왔다.(“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갈 수록 더욱 ‘질이 좋은’ 사람들이 걸러져 나온다. 욕설을 사용하지 않아야 상위 계급 사람들과 보다 잘 어울릴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레 ‘상위계급’ 이라는 것은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위치이자, 지향해야 할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인천에서 거창으로 이사를 하면서, 계급의 추락이라고 할 만한 것을 경험하였다. 현재의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서울과 수도권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지방의 집값은 횡보하거나 오히려 떨어졌으니 말이다. 다문화나 한부모가정이 많았던 시골 초등학교의 같은 반 아이들과 지내면서는, 무의식적으로 ‘이들은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하며, 교육청 영재원에서 만났던 읍내 아이들이나, 대도시의 아이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3. 중학생 시기

  그렇게 코로나가 한창이던 중학교 1학년, 컴퓨터와 코딩이라는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는 지역 친구들 대신, 컴퓨터 관련 오픈채팅3에서 만난 서울에 사는 온라인 친구들과 매일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프로그래밍’이라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그들과 어울리면, 나의 리더십과 코딩 실력, 그리고 방장이라는 지위로 인해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부족하다고 지적받던 사회성과, 시골에 살며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 부족한 영어 실력, 외모4, 08년생이라는 사실, 여자가 되고 싶어했던 과거 등의 이유로 인해, 방장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하고, 심지어는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으로 내가 ‘낮은 계급에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시골을 떠나 서울로 가는 것, 계급 상승을 제 1의 목표로 내재화하게 되었다.

  계급 상승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중학교 1~2학년 때는 게임을 개발해서 돈을 많이 벌어 서울 또는 대구 같은 대도시에서 자취할 만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고, 중학교 3학년 때는 —거창보다는 큰 도시인—진주에 있는 과학고에 진학하여, 도시에 사는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중학교의 ‘남자 반5’에서는 왕따에서 은따 사이의 위치에 있었으니,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이 전혀 아쉽지 않았고, 오히려 ‘나와 관심사가 맞는’, ‘질 좋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기대하였다.

4. 경남과학고

  그렇게 ‘나보다 높은 계급’의, ‘질 좋은’ 친구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그 방법이 ‘대학 진학’은 아니었다6. 그곳의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인맥을 만들고, ‘운명의 단짝’을 만나 연애하고 그와 결혼하면, 계급 상승을 이룰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나의 예상과는 정 반대로 흘러갔다. 과학고에서 만날 ‘질 좋은’ 아이들은 욕설을 사용하지 않고 인성이 좋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씀과는 다르게, 여학생들의 외모를 평가하고, 욕설을 사용하고, 시험 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동기들의 행동을 보고, 인지부조화와 함께 무력감을 느꼈다. 동시에 생명과학을 전공하려고 하는 A를 짝사랑하기 시작하고,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그 이유로 추정되는 요인들(나의 가족, 내가 있는 계급, 외모, 사회성 등)에 대해 자책하며 침체기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무의식적으로는 계속 ‘계급 상승’을 목표로 두고 있었기에, 진로 분야를 —자기소개서에 적었던—‘천문학’에서 ‘생물학’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겉으로는 ‘생명의 다양성과 동시에 존재하는 보편성’ 등, 생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 이유를 댔지만, 실제 이유는 ‘A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와, ‘중간고사 성적이 잘 나와서, 생물학을 주력으로 밀고 가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추론 때문이었다.

  귀가주 주말이면, 동기들의 대다수는 창원에 있는 학원에 가서 공부하였지만, 나는 거창의 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하고, 진주 시내를 홀로 떠돌아다녔다. 스스로 ‘방랑자’니 ‘히치하이커’니 하는 서사를 붙이고, 친구들의 ‘멋지다’, ‘낭만있다’ 하는 칭찬을 듣고 살았지만, 항상 그것은 결국 나의 (상대적으로) 낮은 경제적 계급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5. 대학 새내기로서

  결국은 (카이스트와) 서울대 합격으로 과고 생활을 마무리지으며, 그렇게 바래 왔던 고향으로의 복귀, 그리고 ‘계급 상승’을 이루어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에브리타임같은 커뮤니티에서 농생대를 무시하는 것을 제외하면—, 중학교 1학년 때의 온라인 친구들처럼 나를 무시하거나 따돌리는 사람이 없다. 또한, 학교 안팎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질 좋은 사람들’과 거의 유사하게, 욕설을 사용하거나, 함부로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거나, 누군가의 험담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1학년 1학기, 그리고 2학기 초중반까지는 계급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에 갇혀 살며, 나의 기회를 제한하고 스스로 움츠러들었다.—‘그래도 우리 집이 우리 학교에서는 경제적으로 낮은 계급에 있다’, ‘외모가 잘생기지 않아 높은 계급의 여성과 결혼하지 못할 것이고, 고소득 직종에 취직하지도 못해서, 더 높은 계급으로 상승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학문적으로 높은 계급(본질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 재학중인 학과보다 ‘본질적인 것’을 다룬다고 생각한 다른 학과를 복수전공하거나, 전과하고 싶다는 생각을, 반쯤 강박적으로 품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 몇 달간, 여러 이유의 복합적인 작용—더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아르바이트로 직접 돈을 버는 경험을 하고, 외모 콤플렉스에서 빠져나오는 것 등으로 추정된다.—으로 인해, 최근에는 이런 부정적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유리한 점들을 바탕으로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높은 계급’의 특성을 학문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는 갖추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문과 학생이나 이과 학생 그 누구와도 즐거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교양 지식을 가지고 있고, 말하기 능력이나 글쓰기 능력도 적어도 평균 이상은 될 것이며, 영어 실력이 유학파들에 비해서는 부족하긴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의 글은 이해할 수 있고, 일본어와 독일어 등 비-영어 외국어도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해외여행 경험’이나 ‘고급 음식점’ 등의 경험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충성 소비자로서의 높은 계급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높은 계급이다.7

6. 현 시점의 고민

  지금 시점에서 가장 큰 고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기존 인간관계와의 괴리’이고, 둘째는 ‘서울대 밖의 사회에 대한 무지’이다.

6.1. 기존 인간관계와의 괴리

  거창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 중 지금도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친구는 거의 없다.—어제 서울에 왔지만 못 만났던, 동갑의 중학교 후배가 유일하다.—. 오히려 중학교 3학년 때 한마음도서관에서 만났던, 읍내의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들 중 몇 명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편이다.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그들이 크게 그립거나 보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가끔은 (물론,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를 배척했던 이들과 나의 ‘계급’을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그들과 물리적으로나, 사회적 위치로나, 심리적으로나 멀어져 버렸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중학생 정도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와 줄곧 함께해 오는, 그런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어쩌면 꽤나 공허한 일인 것 같다. 나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친구들과의 우정에 반해 계급 횡단을 택한, 나의 선택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따라온 필연적 결과겠지만 말이다.

  기표를 생각한다. ‘서울대’ 라는 기표를. 그리고 이에 딸린 기의를 생각한다. 지극히 자의적으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그 어떤 개인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오로지 시간만이 차근히 바꿔나갈 수 있는 기의를. 나는 그저, 옛 친구들은 지금의 내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할 뿐이다. 같은 기표 안에 있던 중학생 때, 아마 ’똑똑하지만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었을 그 때와는,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6.2. 서울대 밖의 사회에 대한 무지

  확실히 서울대8 밖, 조금 더 넓게 확장하면, 블로그 이웃들과 그와 비슷한 결의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훨씬 적어진 것 같다. 물론 ‘서울대 내부’에서 나는 편안함과 안정감, 그리고 행복감을 느낀다. 대부분 나와 비슷한 성향과 취향,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학문에 대해 논하는 것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유머 코드 같은 것도 잘 맞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밖의 세계는 어떨까, 중학생 때 반에 한두 명 정도 존재하던 그런 아이들이 아닌, 그 이외 대부분의 아이들은 지금 어떤 어른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쉬이 답할 수 없다.

  인터넷에서는 그 사회에 대한 이야기들이 조각조각 들려온다. ‘윤어게인이 주류가 된 고등학교 사회’, ‘텅 비어버린 지방대 강의실에서, 열등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학생들’ 등등.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저, 그런 사회에서 운좋게 빠져나와 나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을 따름이다.

  나중에 대학신문이라던가 서울대저널이라던가, 그런 학내 언론의 기자를 맡을 일이 생기게 되면, 이에 관한 기사를 작성하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서울대 밖’의 세계를 더욱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짐작할 따름이다.

7. 결론

  결국 ‘히치하이커’를 포괄하는 나의 정체성은 ‘계급횡단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히치하이커 서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은, ‘내 능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주고,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지 않은 자원’을 기꺼이 제공해주는 사람들—가까운 지인들부터 이름모를 사람들까지—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었으니까. 과거를 돌아보며 내린 결론, 앞으로 나아갈 나의 방향은, ‘계급상승에 대한 열망’을 부정하기보다는 받아들이며 점진적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물론 그 계급이란 건 ‘통장 잔고’나 ‘대학 간판’ 따위로 표상될 수 없는, 보다 본질적인 무언가일 테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욱 깊은 사유와 글쓰기가 필요할 듯 한데, 잠정적으로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9’, ‘의미를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8. Reference

  제목 ‘계급횡단자의 향수병 블루스’의 틀은 밥 딜런의 1965년 노래 <Subterranean Homesick Blues(지하생활자의 향수병 블루스)>에서 착안하였고, ‘계급횡단자’라는 용어는 샹탈 자케의 저서 <계급횡단자 혹은 비-재생산>에서 유래하였음을 밝힌다.

  1. 유년기에는 그저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매우 대단하신 분이라 느껴진다.
  2. 여기에는 ‘영어를 잘 해야 한다’ 라는 압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3. ‘초다’라는 유튜버가 개설한 오픈채팅에서 시작하여, ‘컴하는 10대방’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방장이 되어 분리독립한 오픈채팅을 일컫는다.
  4. 당시 한창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밖에서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 정돈되지 않은 모습의 셀카 사진을 보여줬던 적이 많았다.
  5. 학생 수가 적은 시골 중학교의 특성상, 한 학년이 남자와 여자 반 하나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3년 동안 반 구성이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6. 본격적인 학교 생활이 시작되기 전, 2주 정도의 기간 동안 미리 학교 생활을 하는 ‘브릿지 기간’ 도중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친구들에게 ‘조기졸업 안 하고, 대학 잘 못 가도 좋으니,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것을 목표로 하고자 한다.’ 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7. 디지털 밖의 삶을 살고자 하는 큰 원동력 중 하나도 ‘계급 상승’인 것 같다. 가벼운 숏츠 영상으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글쓰기 능력 함양, 독서, 외국어 학습 등으로 높은 계급에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8. 여기서 ‘서울대’라는 기표는, 실제 대학 사회를 포함하여, 현재 내가 거주하는 장소, 가깝게 교류하고 있는 사람들 등을 전반적으로 일컫는다. 실제로, 나와 친밀한 사람들은, 서울대 구성원이 아닌 이들의 비율이 더욱 많다.
  9. 이는 ‘내면’의 반대로서의 ‘외면’과 독립된 가치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 부여된 학력, 경제력 등의 사회적 기표들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